데이비드 호크니의 트루 컬러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1960년대에 명성을 얻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레전드’로 불리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늘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영국 왕립미술원에서 선보일 새 전시에 앞서 그의 L.A. 집에서 작업의 즐거움과 초상화, 죽음을 예상하는 일 그리고 코카인보다는 창조성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데이비드 호크니,로얄 아카데미,L.A.

할리우드 힐스의 아름다운 햇살이 스며드는 막다른 골목, 몽칼름 애비뉴에 위치한 데이비드 호크니의 홈 스튜디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스튜디오 매니저 장 피에르(이하 JP)는 노트북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분주하게 타이핑하고 있고 그 뒤에서 개인 어시스턴트 조나단은 프로젝터 작업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물감으로 얼룩진 바지를 입고 레몬색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넘긴,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호크니가 나에게 스튜디오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 이 집을 샀을 때 이곳은 패들-테니스 코트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패들-테니스는 물론 그 어떤 스포츠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젠틀한 요크셔 브로그 구두를 즐겨 신는 호크니는 단숨에 이곳을 사방이 새하얀 확 트인 스튜디오로 개조했다.호크니는 최근 몇 년 사이 특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런던 영국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이하 RA)에서 7월 2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전시를 위한 초상화 시리즈 ‘82 Portraits and 1 Still-life’는 불과 2년 만에 완성시킨 연작이다. “매일 7시간 정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고, 한 작품 당 이틀에서 삼일 정도 걸렸죠. 누구든지 일주일 내내 꼼짝없이 앉아서 일을 해야 한다면, 삶의 스케줄을 재조정해야만 할 겁니다.” 피카소, 모네, 마티스, 오키프와 같은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은 노년기에도 폭발적인 창조성을 발휘했다. 호크니도 그들 중 하나다. 그는 79세에 이른 지금도 워홀이나 라우션버그로 대표되는 팝아트 컨템퍼러리 신에 뛰어들었던 60대와 마찬가지로 많은 작품을 만들어낸다.4년 전, 그가 마지막으로 RA에서 전시했던 작품은 영국 요크셔 지역의 풍경에 관한 획기적인 전시 였다. 그 다음 해에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를, 2014년에는 (목탄화와 아이패드 페인팅)을, 2015년에는 런던 아넬리 주다 파인 아트 갤러리에서 를 선보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가을에 타센 출판사는 호크니의 일생에 걸친 작품을 담은 책 를 출판할 예정이다. 이 책은 엄청나게 거대하다. 높이는 거의 90cm에 이르며 무게는 30kg 정도로, 이 책을 옮기려면 트롤리가 동원돼야 한다. “책이 너무 무거워서 결국 몇 페이지를 빼버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10월에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마틴 게이포드(Martin Gayford)와 또 다시 함께 쓴 책 가 출판될 예정이다.(두 사람은 몇 년 전 첫 대담 집을 펴냈고 한국에선 2012년에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될 책은 예술에만 관련된 책이 아니라 사진, 텔레비전, 영화까지 다룹니다. 그리고 셀카도 담겨 있죠!(웃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년에는 테이트 뮤지엄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있을 예정인데 이 전시회는 파리의 퐁피두 센터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그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까? 호크니가 작가가 된 이래 적극적으로 사용해온 팩스, 폴라로이드 카메라, 그리고 스케치를 하기 위해 늘 소지하는 아이패드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그를 돕긴 했을 테지만 말이다.“글쎄, 나는 외출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아시다시피 나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컴컴한 밤에 외출을 해야 한다면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듣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할 겁니다.” 그는 청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1970년 이후로 전시 오프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스튜디오 54(1970년대 뉴욕에서 가장 인기 있던 나이트 클럽으로 앤디 워홀 등이 드나들었다)를 좋아하지 않았죠. 참을 수 없는 소음으로 가득했거든요.” 호크니의 청각장애는 유전이다. 그의 아버지와 누나도 같은 불편함을 겪으며 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하는 말씀을 돌아가시기 전 10년 정도는 거의 듣지 못했을 겁니다. 어머니는 늘 조용하게 말씀하셨거든요. 아버지와 나는 대화를 나눌 때 늘 서로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어요. 그렇게 가까이 있어야만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청각장애는 그의 소셜 라이프 범위를 급격하게 축소시켰다. 그는 군중을 피하기 시작했으며, 붐비는 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친구들을 초대하긴 했지만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말을 할 때 어려움을 느꼈고, 물론 음악은 없었다. 더 이상 콘서트와 오페라를 즐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 스튜디오의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침묵을 지켜야 한다. “나는 늘 일을 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파티는 좋아하지 않아요. 타센에서 나오는 책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밟아서 담배를 끈 후에 스튜디오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말을 이었다. “아티스트로서 나는 여전히 처음과 같이 의욕이 넘쳐요. 정말로 늘 그래 왔습니다. 아직까지 힘에 부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루에 7시간은 그림을 그릴 수 있거든요. 아티스트는 은퇴하지 않아요. 늘 계속해서 작업하는 사람들입니다.”초상화는 호크니의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고 어려웠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2012년 의 성공 이후, 그는 초기 뇌졸중으로 고통 받았으며, 2013년 초에는 23세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 도미니크 엘리어트가 그의 집에서 하수구 청소액을 먹고 자살했다. 이것은 마약과 섹스에 얽힌 추악한 스토리이며 여기에는 호크니가 오랫동안 교제했던 전 남자친구 존 피츠허버트도 얽혀 있다. 분명 호크니가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그를 좌절시켰다. 몽칼름 애비뉴로 돌아왔을 때 호크니는 유례없이 4개월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 4개월은 그가 작가가 된 이래 가장 오래 작업을 쉰 기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크니는 스튜디오 매니저 JP를 모델 의자에 앉혔다.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JP가 부드러운 프랑스 악센트로 그날에 대해 들려줬다. “갑자기 모델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잠깐 있어.’ 바로 자화상이었죠.” 감각이 살아나고 있었다! 호크니는 빠르게 친구들과 지인들을 찾았다. 그리고 초대하면 올 만한 거의 모든 사람들. 그는 아이패드에서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갤러리스트 래리 가고시안(“가고시안은 나에게 단 이틀만을 허락주었습니다.”), 출판업자 베네딕트 타센(“그는 나의 이웃이고, 우주선 같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을 포함해 그의 모델이 되어준 사람이 10명쯤 되었을 때 그는 생각했다. ‘더 많으면 좋을 것 같군.’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모델을 찾는 과정 자체가 매력적이었어요. 나에게는 모든 이가 흥미로웠으며 모두 각기 다른 개인으로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호크니는 이번 초상화 전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영국의 살아 있는 전설로 거론될 것이다. 특히 루시안 프로이트의 죽음을 계기로. 하지만 그는 이러한 명예를 거부한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언론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뿐이죠.” 1990년, 그는 기사 작위를 거절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데이비드 경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2012년에 여왕의 훈장은 수락했다. ”그건 오직 24명만이 받았고, 그래서 나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대단한 건 아니에요. 나에게는 전시회가 더욱 큰 의미를 지닙니다.” 호크니는 전시회를 앞두거나 끝난 후 언론의 비평에 대해 불안해할까? “아니오.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나요? 매스컴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자만이 비평에 신경을 씁니다. 그게 그들이 하는 전부니까. 게다가 중요한 비평은 신문에서는 찾을 수 없어요.” 피카소는 비평에 신경 쓰지않았고, 호크니가 존경하는 다른 아티스트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피카소 같은 사람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그를 탐구하기 시작했어요.”그의 초상화는 약 1백30만 파운드의 가치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가장 비싼 작품이 얼마인지 알고 있을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지난 55년 동안 내가 원하는 것을 할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돈이 없었을 때도 돈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한 적은 없어요. 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일에만 흥미가 있습니다. 그걸 할 수 없다면 대체 돈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데이비드 호크니는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삶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과 마음의 상태인 ‘보헤미아(Bohemia)’에 살고 있었다.1964년에 호크니는 L.A.로 갔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그의 출신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요크셔 악센트 때문에 놀림을 당했지만, L.A.에서는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게이에게는 훨씬 더 나은 장소였다. “1964년 그곳에는 레드 레이븐이라는 큰 게이 바가 하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뉴욕에도 게이 바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L.A.에서 그의 커리어는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의 수영장 그림과 게이 관계에 대한 그림 그리고 부모님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통해 데이비드 호크니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런던으로 갔다가 파리를 거쳐 L.A.로 돌아왔는데,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삶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과 마음의 상태인 ‘보헤미아(Bohemia)’에 살고 있다고 여겼다. “1960년대에는 게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보헤미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보헤미아에서 나는 당당하게 게이로서 살아갈 수 있었죠. 그곳에서 나는 뭐든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보헤미아에는 마약이 있었다. 그도 잠깐 손을 댔지만 그에게 항상 첫 번째는 작품 활동이었다. “나는 그레고리 에반스(40년 동안 같이 일했고 10년 동안 애인이었다.)와 함께 코카인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 매우 냉철하고 진지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때는 늘 더 많은 코카인을 원했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지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난 일이 많다고!’” 호크니는 보헤미아를 그리워한다. “뉴욕은 지겨워요. 무엇보다 보헤미아가 되기에 집세가 너무나 비싸죠. 젊은 사람들이 머물 수 없는 곳이라면 그곳은 죽은 장소가 될 겁니다. 금연은 물론, 이것도 금지, 저것도 금지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보헤미아가 아니에요.”데이비드 호크니는 동성애 결혼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자신이 결혼에 이르는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결혼을 해서 가족을 꾸리는 것에 대해서는 열정적이지 않았어요.” 그의 마지막 애인은 존 피츠허버트였고, 그들은 2009년에 결별했다. “나는 늘 내가 싱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가족과 같은 존재는 있어요. 아마 모두들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티스트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지인 중 몇몇은 아티스트이면서 좋은 부모이기도 한데, 그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요.(웃음)” 웃음이 잦아들고 그가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나도 분명히 놓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스스로 관리하는 것 아닌가요? 런던에서 열리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 갔을 때, 에 실렸던 기사의 일부분이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자들이 언론 홍보 담당자에게 만약 비가 오면 어떻게 할 건지 물었던가 봐요. 그 담당자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방법을 찾아야죠.’ 아주 좋은 답변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한 문장이 내가 늘 살아왔던 방식을 대변합니다. 무언가 놓쳤다면 다른 곳에서 그걸 대신할 것을 찾아서 채우면 됩니다.”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는 정원으로 나왔다. 호크니가 그렸을 법한 전형적인 L.A.의 신, 파란 하늘과 야자수, 크리스털 수영장을 배경으로 우리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사진을 찍었다.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내려놓은 뒤에 호크니는 ‘집’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국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런던의 전시회를 고대하는지, 그리고 런던 켄징턴의 아파트에서 머물면서 멀지 않은 독일 남서부의 온천 휴양지 바덴바덴에 가서 피로를 풀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올 만족스러운 일상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집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몽칼름 애비뉴의 아늑한 전원. “L.A.에서는 매우 사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차를 몰고 이동할 수 있고, 런던이나 뉴욕처럼 거리에서 사람을 마주칠 일도 없죠.” 2013년 이후 그는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조나단이 그런 일들을 대신 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늘 양옆으로 확장하듯 뻗어 있는 L.A.를 사랑했어요. 뉴욕은 수직적이기 때문에 내 관점에선 악몽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호크니는 ‘관점’에 대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깊이로 공부한 아티스트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왜 중국 그림에는 그림자가 없고, 유럽의 그림에만 있는지 하는 의문에 대해 “그것은 르네상스 아티스트들이 암상자를 이용했기 때문이죠.”라고 느긋하게 알려줄 수 있는 아티스트다. 그것은 그가 입증해서 유명해졌으며,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해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호크니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있는 JP가 시계를 보며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린다. “5분 남았어요. 이제 쉬어야 해요.” 정원에서 식사가 차려지고 있는지 식욕을 자극하는 좋은 냄새가 넘어온다. 타이밍이 이상했지만 나는 그에게 죽음에 대해 물었고, 그는 계절에 비유했다. “아직 겨울이 온 것 같지는 않아요. 가을쯤 되겠네요. 내가 언제 죽을지 나는 알 수 있습니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나의 예술은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는 사실도요.” 카멜 라이트를 꺼내 불을 붙이며 그는 여섯 번째 담배를 태웠다. 연기를 머금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햇살을 바라본다. “나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것을 좋아하지만, 타센의 책은 과거를 돌아보게 해주죠. 거기에는 모든 작품들이 나옵니다. 자신 있게 이 책이 훌륭한 책이 될 거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내가 2D 세계를 어떻게 3D 세계로 표현할지 고민하는 아티스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늘 이 질문을 품고 살 겁니다. 죽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