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카니와 시추킨의 컬렉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컬렉터와 컬렉션이라는 테마는 통속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한 구석이 있다. 이야기는 우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다면적인 캐릭터를 가진 한 인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욕망이 있다. 미술품은 사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에 컬렉션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우연과 행운, 집념과 집착, 희극과 비극의 연속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이런 과정을 수없이 겪으면서 욕망은 잘 벼린 칼처럼 다듬어지고 더 강해진다. 그러므로 컬렉션은 하나하나의 미술작품 모음이 아니라 컬렉터가 남긴 욕망의 결정체다. | 컬렉터,발카니,시추킨

발카니가 남긴 욕망의 결정체오는 9월 28일과 29일 세 차례에 걸쳐 열리는 소더비의 발카니 컬렉션 경매는 ‘프랑스에서 다시 볼 수 없을 컬렉션’이라는 요란한 선전 문구를 달고 등장했다. 일부러 파리 앤티크 페어 기간에 맞추어 시기를 조절했을 만큼 흥행 기대주다. 총 1천5백만 유로, 현 환율로 1백84억원에 달하는 추정가 때문만은 아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개인 컬렉터들은 미술재단을 운영하지 않는 한 컬렉션 전체를 공개하지 않는다. 컬렉션이 컬렉터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는 경우는 단 하나, 컬렉터가 사망했을 때다. 경매 관계자들로서는 컬렉터의 죽음이 다시 없는 호재가 되는 셈이다.로베르 발카니(Robert de Balkany)는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예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34살에 프랑스 최초의 미국식 복합 쇼핑몰을 지어 성공가도를 달린 부동산 개발자다. 살아생전 그는 재력가로도 유명했지만 귀족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사교계에서 더더욱 이름을 날렸다.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이자 이민자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이자 이탈리아의 마지막 왕이기도 했던 움베르토 2세의 딸을 신부로 맞이했고 덕택에 귀족 작위를 얻었다. 파리 근교 성을 사들여 미국 상류사회의 상징이기도 한 스포츠 폴로를 즐기고 여름이면 요트를 타고 유럽 곳곳을 여행했으며 겨울이면 영국의 블렌하임 성에서 사냥을 즐겼던 발카니는 1970~80년대 유럽 사교계의 스타였다.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과 탄탄한 몸, 턱시도 정장을 사랑했던 이 댄디의 모습은 소설 의 현실판이다. 유럽의 성을 본뜬 거대한 저택을 짓고 그 안에 외부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의 등장인물들처럼 발카니는 파리 바렌 가의 저택을 18~19세기 유럽 전통 미술품으로 가득 채웠다. 가장 최첨단이라는 쇼핑몰을 지어 성공가도를 달린 인물이 이미 사라져버린 귀족 세계를 동경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그는 피를 머금은 듯한 특유의 색채 때문에 로마시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중세시대에는 고위급 성직자들의 유골함을 만들 때 쓰였던 반암인 포르피리, 이집트 왕가의 상징인 말라카이트, 희귀한 대리석 등을 좋아하는 르네상스 시대 권력자들과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경매에 출품된 작품 중 최고로 꼽히는 보르게즈의 장식장은 발카니 취향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전면에 라피즈 라즐리, 대리석, 수정, 벽옥이 촘촘하게 박힌 이 흑단 가구는 가구라기보다는 지상에서 누리는 광영을 증언하는 기념패에 가깝다. 1620년 당대 최고의 권력자라 할만한 보르게즈 교황의 주문 아래 만들어졌으며 1827년 영국의 조지 4세가 사들인 이후 영국 왕실 컬렉션으로 윈저 성과 버킹엄 궁전을 장식했다. 보르게즈의 장식장은 권력자를 위해 태어나 오로지 권력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물려 내려온 작품인 셈이다. 통상 경매에서는 미술사적인 가치도 중요하지만 출처 역시 가격을 좌우하는 요소다. 보르게즈의 장식장은 현재 추정가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 추정가를 환산하는 게 무의미할 만큼 보기 드문 작품이라는 의미다.발카니는 신기루같이 온갖 영광된 과거의 기억을 가진 작품들 사이에서 밤마다 탁상시계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발카니 컬렉션은 저택을 장식했던 컬렉션인 만큼 가구를 비롯해 조명, 은 장식품 같은 공예품이 많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60여 점에 달하는 18~19세기 탁상시계 컬렉션이다. 왕가나 일부 귀족만이 탁상시계를 소유할 수 있었던 시대, 탁상시계는 당대의 최신 과학과 귀한 소재, 유명 장인들의 기술이 결합된 꿈의 공예품이었다. 그야말로 발카니다운 취향이라고 할까. 아무나 만들 수 없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데다 아무나 가지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들에 그는 욕망을 투사했다.회화에 있어서도 발카니는 일관적인 취향의 소유자였다. 17세기 영국 초상화계의 혁명적인 스타였던 반 다이크의 카르나르본 백작부인의 초상화는 미술사적인 가치와 더불어 그 희귀성 때문에 13억원이라는 추정가를 훌쩍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작품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앙투안 프랑수아 칼레가 그린 루이 16세의 초상이라든가 이야생트 리고 스타일로 그린 루이 15세의 초상화처럼 미술사적으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왕가의 컬렉션에서 유출된 초상화, 귀족 가문에서 자자손손 내려오는 초상화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카니는 신기루같이 온갖 영광된 과거의 기억을 가진 작품들 사이에서 밤마다 탁상시계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간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되 귀족보다 더 귀족처럼 살아간 사나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시추킨의 애틋한 열정컬렉션이 컬렉터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오는 데는 역사에 비견될 만한 사연이 따른다. 오는 10월 루이 비통 미술재단에서 공개되는 시추킨 컬렉션은 냉전 시대가 종결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던 컬렉션이었다. 원 주인은 세르게이 시추킨(Sergei Shchukin), 19세기 러시아 제정 말기에 직물 산업으로 성공한 신흥 부르주아 집안 시추킨 가의 아들이다. 시추킨 집안의 인물들은 여러모로 톨스토이가 묘사한 전통적인 러시아 귀족과는 달랐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 아래 대대로 상속받은 광활한 영지를 바탕으로 기존의 가치관에 천착했던 전통 귀족과는 달리 그들은 신산업과 상업에 투자해 부를 일구었고 파리와 런던, 콘스탄티노플을 오가는 국제적인 비즈니스 감각의 소유자들이었다. 세르게이를 비롯 그의 형제인 드미트리, 이반, 피오트르는 독일에서 공부했고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오페라와 전시회, 만국박람회를 섭렵했다. 자연히 취향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당대의 문화인답게 시추킨 가의 형제들은 청소년기 때부터 각자의 뚜렷한 취향이 엿보이는 개인 컬렉션을 시작했다. 피오트르는 동양의 공예품과 일본 판화를 수집했고, 드미트리는 베르메르, 부셰, 프라고나 같은 서양 고전회화 작품을 사들였다. 가장 감성적이고 유행에 민감했던 이반은 아예 파리에 거주하며 로댕, 드가, 르누아르 같은 프랑스 컨템퍼러리 미술에 눈을 떴다. 형제들을 대표하여 회사를 이어 받은 세르게이는 사업 때문이었던지 형제들 중 가장 늦은 나이인 43세에 모네의 작품 ‘벨 섬의 바위들’을 구입하며 첫 컬렉션을 시작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모네, 세잔, 드가, 고호, 고갱, 블라밍크, 후소 등 당시 컨템퍼러리 화가들로 꼽히던 후기인상파들의 작품을 연달아 사들이면서 그의 모스크바 저택인 투루베츠쿠와 궁은 ‘현대미술관’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그냥 붙은 별칭이 아니다. 타히티 시절을 대표하는 고갱 작품 29점, 당시 후기인상파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세잔의 작품 24점,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 중 가장 인기 있었던 모네의 작품만 19점이다. 게다가 13점의 르누아르 작품까지 더하면 질과 양으로 오르세 박물관의 컬렉션이 부럽지 않은 규모다.게다가 시추킨은 매주 일요일마다 선진 미술의 흐름을 알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컬렉션을 공개했다.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힘든 대 부르주아였던 그가 박물관의 큐레이터처럼 집 안으로 관람객을 이끌고 다니며 설명을 자처했다니 파격적인 일이다. 16점의 고갱 작품이 빼곡히 걸려 있어 ‘고갱에게 바치는 신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식사 공간과 세잔의 작품만 따로 모아 꾸민 세잔의 방 등 시추킨의 저택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가장 혁신적인 개인 갤러리였다.후기 인상파 화가들을 두루 섭렵하던 시추킨은 방황에 종지부를 찍듯 1908년부터 오로지 단 한 명의 화가만을 편애하기 시작한다. 바로 마티스다. 마티스의 회상에 의하면 그들의 첫 만남은 1904년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데뷔하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마티스가 스승으로 여겼던 세잔의 작품을 수집해서일까. 시추킨은 마티스의 초기작인 ‘테이블 위의 그릇들’이라는 정물화에 흥미를 느꼈지만 그 가치에는 의문을 가졌던 듯하다. 거침없이 작품을 사들였던 그답지 않게 이번만은 망설였다. 며칠 집에 걸어 놓고 싫증나지 않을지 두고본 후 작품 가격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시험기간을 거친 뒤 시추킨은 마티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컬렉터가 된다. 1909년 시추킨은 저택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현관에 걸어 놓을 생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 두 점을 주문했다. 가로 길이가 4미터에 가까운 마티스의 대표작 ‘댄스’와 ‘뮤직’은 그렇게 탄생했다. 마티스는 특히 ‘댄스’란 주제를 마음에 들어해 시추킨을 위한 ‘댄스’ 외에도 여러 점을 제작했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시추킨 컬렉션과 모마의 버전 두 점뿐이다. 시추킨의 소장작에는 원작에는 없던 물감 자국이 덧칠되어 있다. 마티스의 ‘댄스’와 ‘뮤직’은 파격적이다. 당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눈이 베일 듯한 파란색과 초록색 바탕에 빨간색의 다 벗은 인물들이 춤을 추는 괴상망측한 작품이다.첫 스케치를 본 시추킨은 성기 부근을 살짝 가려달라 요구했으나 마티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작품이 배달된 후 스스로 성기 부근을 살짝 덧칠했고 1911년 시추킨의 저택을 방문한 마티스는 덧칠된 작품을 보고 쓴웃음을 삼켰다. 시추킨은 1917년까지 빨강 방을 비롯해 초기작부터 중기작에 해당하는 마티스의 작품 37점을 수집했다. 그의 꿈은 저택을 마티스와 피카소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아방가르드 했던 포비즘의 대표자 마티스와 큐비즘의 창시자 피카소의 작품이라니, 근엄한 자산가의 얼굴을 한 이 남자의 가슴속에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뜨거운 정신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만약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시추킨의 마티스 컬렉션은 그의 후기작까지 수집한 가장 완결된 마티스 컬렉션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으로 시추킨의 모든 사유 재산은 국유화되었다. 공산 혁명의 아궁이에서 부르주아였던 그가 처형 당하지 않고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피신한 뒤 시추킨은 마티스의 아틀리에에서 멀지 않은 니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마티스는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컬렉터를 위로하기 위해 시추킨을 찾았고 아틀리에에도 초대했지만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티스에게 작품을 보아도 이제는 살 수 없다며 과연 컬렉터답다고 할 통탄을 남겼다.시추킨 컬렉션은 2차 대전 동안 우랄 산맥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소문만을 남긴 채 레닌과 스탈린 이후 펼쳐진 긴 냉전시대 동안 존재 여부가 미스터리로 남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작품이 한두 점씩 공개되었고 그 사이 컬렉션은 반으로 나뉘어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박물관과 푸시킨 박물관이 나누어 소장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시추킨의 후손들은 작품 반환을 위해 여러 건의 국제 소송을 제기했다. 시추킨 컬렉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마티스의 작품들이 좀체 러시아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티스의 최대 컬렉션인 시추킨 컬렉션이 러시아에 묶여 있는 데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개인 소장으로 남아 있어 일반인으로서는 마티스의 작품을 실제로 대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올가을, 마티스를 비롯한 시추킨 컬렉션이 마침내 완전체로 일반에 공개된다. 질곡의 역사를 거쳐 끈질지게 살아남은 시추킨의 욕망을 만날 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