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확인하는 예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올해 리움의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수상한 박경근 작가를 을지로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한국의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과 그 무리 속의 개인에 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군대: 60만의 초상’. ‘객관적 시각’으로 재단한 듯한 그의 작품이 실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스스로의 내면과 감정에 기반을 둔 결과물이었다는 뜻밖의 사실에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 박경근

"변한 건 없어요. 한 일주일 정도 여기저기 인터뷰한 것 말고는요.” 리움 아트스펙트럼 수상 뒤 좀 바빠졌냐는 질문에 박경근 작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2001년부터 격년으로 열린 리움 ‘아트스펙트럼’전은 2014년부터 전도 유망한 젊은 작가 10명(팀)의 작품을 전시하고 그중 심사를 거쳐 한 명에게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수여하는 제도이다. 올해 리움은 그 두 번째 주인공으로 박경근을 선정했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서고 싶어하는 그 자리에 올라 박경근은 의외의 수상소감을 발표했다. 스스로를 “예술이라는 쓸모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 다소 파격적으로 들리는 예술의 쓸모없음에 대한 선언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대가들이 해온 말이에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사회적 책임을 가진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의 미국 선생들의 말을 믿었어요. 그런데 예술을 더 이해하고, 한국에 살면서 그들의 말이 내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회적 책임감이나 거대 담론을 가진 예술을 만드는 것이 대세인 한국 미술계에선 서양의 진보적 담론이 오히려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작가인 저에게 더 도전적인 고민은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나의 감정’이 무엇이고, ‘남이 내 작업을 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거였어요. 그리고 이런 저의 고민은 사회에 정말 쓸모없는 고민이죠. 사회 속에서 쓸모없음의 자리가 예술이 위치할 곳이라고 생각해요.”어두운 전시장 한 면을 가로로 가득 채운 17분짜리 작품 앞에 앉는 순간, 관객은 한눈에 보기 불편할 정도로 긴 프레임과 클로즈업, 하이 앵글을 통한 긴장감 있는 화면에 완전히 압도 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의장대에 입대한 한 명의 군인을 따라가는 카메라. 그 속의 주인공은 오롯이 한 개인이 되었다가도 이내 집단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아트스펙트럼 수상작인 ‘군대: 60만의 초상’은 한국의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과 그 무리 속의 개인에 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2010년 ‘청계천 메들리’, 2014년 ‘철의 꿈’을 극장과 전시장에서 선보이며 그는 꾸준히 국내외 미술계와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박경근은 6살 이후 해외에서 죽 생활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이제 11년에 접어든다며 스스로 작가의 포지션으로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삶의 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낸 영향 때문일까? 작가의 시선은 타국과 이국 경계의 그 어느 지점에 포진해 있는 듯했다. 그의 작업들은 마치 외지인이 바라본 한국의 근대화나 사회상을 보여주듯 무척 관조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사실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스스로의 내면과 감정에 기반을 둔다.'군대: 60만의 초상’에서 그는 한국 군대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폭로극 같은 설정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여태 그것을 대상과 자신과의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는 작가의 ‘객관적 시각’의 결과물로 보았는데, 이 대목에서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오히려 상당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작품은 다 제 감정에서 출발해요. 물론 제 작품이 신파나 ‘나 힘들어’라고 호소하거나 분출하는 건 아니에요. 자기에 집중하는 작가 중 상업적 욕망이나 스스로의 고통을 작품으로 분출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은데 전 그건 자기 감정을 관객에게 떠넘겨버리는 무책임한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런 작가들은 상당히 업보가 많을 거예요(웃음). 앞서 얘기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예술가들과 자기 감정 분출에 집중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매우 양 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없는 건 감동과 주체성입니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은 항상 나와 타자 간의 선을 그은 다음, 자신의 감정을 다 자기 선 안에서 처리하며 작품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감정을 처리하여 배설하는 거죠. 일종의 소화과정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여기에서부터 현대미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나를 항상 의심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며 자신을 체크해야 해요. 나를 칼 같은 시선으로 봐야 하는 거죠. 물론 어렵죠. 하지만 그런 자의식으로부터 작품을 시작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아가선 작품을 통해 나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박경근이 카메라에 담아온 것들은 한국 사회에 대한 작가적 질문이자 스스로가 찾은 답변이다.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해외에서 보낸 박경근에게 한국의 근현대사를 반추하는 소재는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작가가 아니었다고 했다. 디자이너이자 뮤직비디오 편집자였다. 그런 그가 29살에 귀국해 처음 겪은 한국 사회는 바로 군대였다. “한국에 들어와서 작가의식이 생겼어요. 그전에는 내가 뭔가를 표현해야겠다는 욕구가 없었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군대에 다녀오고 한국에 살면서 쌓인 게 많다 보니 그때부터 작가의식이 생겼습니다. 혼자 외국에서 살다 갑자기 가족 가까이, 모국에 다시 살게 되니 적응이 안 됐어요. 한국어를 써도 아무도 날 이해 못하니까 제 감정 표현을 작품으로 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문득, ‘여기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역사책을 보고 이성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서와 감정으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는 지역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거였고 국가 정체성이나 한국 근대화라는 소재는 나의 사적인 질문에서 시작한 결과였죠. 나라는 존재는 엄연히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요. 작품의 출발점은 나의 불안한 감정이었습니다.”한국 사회에 들어와 작가의식이 발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군대: 60만의 초상’은 그가 필연적으로 제작해야 할 주제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 60만의 초상’은 ‘철의 꿈’ 전부터 진행하고 있었어요. 제대를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스스로 작업에 대한 비전이 불분명했고, 때문에 촬영도 불가능했어요.” 영상 중간 걸 그룹의 공연에 열렬하게 환호하는 장병들의 모습을 보자니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마침 함께 전시를 본 군필자는 “나도 군대에서는 저랬어. 그때는 그랬는데 왜 그랬는지 몰라.” 하는 후기로 ‘정말 저럴까?’ 하는 나의 의심을 불식시켰다. 군대란 한국 사회의 집단성과 상명하복의 수직구조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폐쇄적 공간 아닌가. 그 무리에서 한 발짝만 떨어져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는’ 집단의 광기가 개인의 이성을 말살한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이 집단주의는 군대의 조직적 문화, 그리고 이곳을 거친 한국 사회의 주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나의 추론에 작가는 답했다. “사실 저도 처음엔 그런 편견이 약간 있었는데 진지하게 들여다보니 보니 한국 사회의 문제가 군대에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한국 문화의 문제가 군대로 들어간 거죠. 한국 문화가 군대에 영향을 끼친 거라고 생각해요. 군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혹은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도 이미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태도가 내재되어 있어요. 군대는 초, 중, 고, 대학 제도권 교육의 연장인 한국 문화의 박사 학위 정도가 아닐까요? 서양 군대의 실력주의와 규율, 한국 군대의 충효사상과 애국심은 군 문화의 장점이에요. 이것은 과거 산업화나 조국근대화에는 필연적인 가치관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개인의 독자성, 주체성과 독창성, 창의력 같은 가치관이 현재와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생각해요.”인터뷰 동안 그는 계속해서 ‘개인의 틀’과 ‘내면’을 강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거대 서사보다 개인의 감정이 더 중요한 시대이고 양보다는 질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개인이 꾸준히 질에 대해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있는 감각적 기준을 질문하고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어찌 보면 쓸모 없는 예술 행위가 그 핵심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로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은 삶에 대해 내 언어로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이야기가 스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박경근 작가의 작품 소재에는 모두 남성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문득 다음 작품의 주제가 궁금해졌다. “한국 남성에 대한 질문은 내년 ‘군대: 60만의 초상’ 영화 버전을 마무리하며 마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성적인 주제를 많이 다뤘어요. 다음에는 성이란 주제를 가지고 남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 불안감이 어디서 오나 생각해보니 어머니로부터 온 것 같거든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감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제가 남자니까 여자의 입장에서 얘기할 수는 없겠죠.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여자를 많이 이해해보려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