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형의 소장품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누군가의 소장품은 그 주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아티스트 정금형의 물건들이 말해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정금형

지금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는 정금형 작가의 개인전 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 도착한 이들은 실험실이나 병원 응급실, 혹은 ‘긱’한 오타쿠의 방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간에는 기괴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형들과 신체 부위 어딘가가 손상 되어 있는 마네킹, 거대한 인체 풍선, 남자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장난감, 응급 환자를 위한 심폐소생술 키트와 각종 헬스 기기, 산업용 진공청소기, 첨단 기술을 탑재한 드론까지 천연덕스럽게 한자리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책들과 건설기계 중장비 운전 기능사 수험서까지 보고 나면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싶은 이 물건들의 주인은 아티스트 정금형이다.전시 오프닝 당일,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의 전시장에서 마주한 그녀는 기묘한 물건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소장품’을 소개했다. 마치 친구들을 방에 초대한 남학생이 게임기며 만화책을 자랑하듯이 말이다. “중장비 운전 기능사 수험서는 ‘유압진동기’라는 작업을 할 때 봤던 거예요. 그 작업에서 굴착기를 운전해야 했기에 실제로 면허를 땄거든요. 이 마네킹들은 의정부에 있는 어느 가게에서 샀어요. 너무 낡아서 판매하지 않으려는 걸 계속 설득했더니 그냥 공짜로 주셨어요. 체지방 분석기며 헬스기기들은 ‘휘트니스 가이드’의 무대 위에 올려졌던 거고요. 여기 모아둔 것들은 언뜻 콘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풍선이에요. 공연 연습할 때는 아끼느라 사용한 풍선을 쓰고 또 썼거든요. 공기가 들어갔다가 빠지고,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이런 모양새가 됐어요. 그 시간들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실제로 사용했던 콘돔을 모아둔 것 같은 느낌도 받아요. 대부분 공연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이지만, 공연과 상관없이 제가 이런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되게 재밌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라는 사람의 어떤 질서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게 일목요연하지 않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요.(웃음)”그러니까 여기 모여 있는 물건들은 정금형의 작품의 재료가 되는 것들이다. 육체 예술가로 불리는 퍼포먼스 작가 정금형은 인형이나 마네킹, 기계 등의 오브제를 매개로 하는 퍼포먼스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 물건들을 ‘상대역’이라고 표현했다. “제가 하는 공연은 정확한 의미의 일인극은 아닌 것 같아요. 제 머릿속에서는 항상 듀엣이었거든요.” 정금형은 무대 위에서 각종 오브제들과 뒤엉켜 야릇하고 기묘한, 몸의 예술을 만들어낸다. 늙은 남자의 가면을 달고 있는 진공청소기와 함께 무대에 올라 섹스를 연상시키는 몸짓을하고(‘7가지 방법’), 헬스장처럼 꾸민 무대에서 의학용 뇌 모형을 올려놓은 벨트 마사지기로 몸을 풀고(‘휘트니스 가이드’), 강력한 힘으로 상하운동을 하는 굴착기와의 사랑을 묘사하기도 한다(‘유압진동기’).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녀의 작업은 2013년에 이루어진 ‘심폐소생술’과 작년 말 문래예술재단에서 선보였던 ‘재활훈련’에서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이 두 작품에서 그녀는 각종 의료 기구를 이용하여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무생물에게 욕망과 감각,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그녀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며 필사적이기까지 하다. “관객석에서 박장대소 하는 웃음은 잘 안 나오죠. 그냥 피식 웃거나 이게 웃어도 되는 상황인 건가 싶은 반응이 많은 것 같아요.(웃음) 저야 관객분들이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지만, 웃음이 발생하도록 계산해서 만들지는 않았어요. 관객의 시각에서는 그림이 어떻게 보여질지, 시각적인 면을 많이 고려하는 편이에요.”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무는 작업을 선보여온 정금형의 이번 전시는 아예 무대가 아닌 화이트 큐브 안에서 펼쳐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동안의 정금형의 작품을 분류하고 재배치하며 총망라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제 작품은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기가 힘든데, 공연의 과정과 결과를 다 볼 수 있는 이번 전시가 제 작업을 낯설게,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지금 이 전시도 하나의 공연일 수 있겠죠. 저는 수집가, 물건들은 소장품으로서의 역할을 연기 하고 있는 셈이죠.” 전시장 곳곳에 틀어놓은 정금형의 퍼포먼스 영상을 보다가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히데코의 낭독 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의 폭력적인 시선 앞에서 야서를 읽어야 하는 히데코는 언뜻 성적 권력의 피해자로 보인다. 그러나 이 낭독회 장면에서 무력해지는 것은 오히려 방청객으로 철저히 전락한 남성들이다. 이런 종류의 전복의 쾌감을 정금형의 작품에서도 즐길 수 있다. 우연히 의 전시장에 흘러들어온 ‘아저씨’ 그룹은 콘돔을 연상시키는 풍선과 야한 장난감들이 모여 있는 섹션에 머물며 점잖게 ‘기념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또한 우아하고 고상한 미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전시장을 찾은 ‘높으신’ 누군가는 정금형이 펼쳐 놓은 괴상한 물건들과 성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작동하는 그녀의 퍼포먼스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을 했다고 한다. 정금형의 무대 위에 올려지는 인형은 지나치게 사회화되어 경직된 신체와 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정작 정금형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다.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의미를 따로 제공하려고 하진 않아요. 저는 공연 만드는 방법이나 구조 짜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요. 계속해서 인형극에 필요한 기술을 수집하고 움직임의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드론을 구입했어요. 이걸 무대 위에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지금은 이게 최대 관심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