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엔날레 표류기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올해의 광주비엔날레는 웅장하고 화려한 작품이 선사하는 스펙터클 대신 고요하고도 풍성한 사색의 시간을 준비했다. | Art Diary,광주비엔날레

제8기후대. 제법 긴 부연설명이 필요한 타이틀을 달고 제11회 광주비엔날레가 시작됐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제8기후대’라는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일상에서는 지각하지 못하는 어떤 세계를 뜻한다. 그러니까 틈새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예술의 힘, 현실과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의 역량을 탐구하겠다는 것이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포부다. 이처럼 진지하고도 우아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는 개막식 당일의 기자 회견장에서 누군가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큐레이터 팀이 모두 여성인데, 특별한 의도가 있나요?” 이때 단상 위에는 최빛나 큐레이터와 아자 마모우디언, 마르가리다 멘데스, 미셸 웡 등의 보조 큐레이터들, 그리고 광주비엔날레의 예술 총감독 마리아 린드가 있었다.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해온 전문가들이다. 마리아 린드는 싸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딱 한마디 했다. “이 사람들이 최고의 팀이고, 이 작품들이 최고의 작품들이며, 여성은 곧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짧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여기 있는 ‘여성’ 큐레이터들은 올해 광주비엔날레에 1백1명 아티스트의 2백52개 작품을 풀어놓았다. 만약 인스타그램에 업데이트할 무언가를 기대하고 올해의 광주비엔날레를 찾는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화려한 작품이 선사하는 스펙터클 대신 사색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첫인상은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다. 심지어 텅 비어 보이기까지 한다. 과감한 전시 공간 때문이다. 넓은 한 층을 전혀 구획하지 않고 띄엄띄엄 작품을 배치한 이번 비엔날레의 전시장은 일종의 광장 같은 느낌을 준다. 인적이 드문 광장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가던 길을 잘 가고 있다가도 갑자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기분. 하지만 그 막막한 기분이야말로 올해 광주에서 해야 할 경험일지도 모른다. 마리아 린드는 말했다. “나는 구경거리를 위한 쇼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스펙터클을 위한 스펙터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스펙터클은 일부 관객의 내면에서만 일어날 것입니다.”이 말만 들어봐도, 이번 비엔날레는 멈춰서 사유하는 사람만이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현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제1 전시실 입구 상부에는 ‘샴페인 잔’이 걸려 있다. 영롱한 샴페인 잔을 천에 프린트한 이 작품은 아그니에슈카 폴스카(Agnieszka Polska)의 ‘휘발유를 담은 유리잔’이다. 축배를 터뜨리는 비엔날레의 시작점에 걸맞은 이미지인 듯 싶지만, 자세히 보면 샴페인 잔 안에 든 액체가 석유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푸른빛과 노란빛, 핑크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샴페인 잔은 아름답다. 우주에서 보면 마냥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매일의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 지구, 혹은 시각적으로 매혹적이지만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는 현대미술처럼. 이 작품 뒤로는 큰 서점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 펼쳐져 있는 책 가판대에 사람들이 모여 책을 고르고 있다. 전시장 한복판에 웬 서점인가 싶겠지만,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이 공간은 스페인 작가 도라 가르시아(Dora Garcia)가 1980년대 광주의 상징적인 공간이던 녹두서점을 작품으로 구현한 것이다. 녹두서점은 1976년 윤상원이 파리 코뮌에 대한 시인 김남주의 연설을 참관했던 장소이자, 여성들이 폭력과 오보에 대항해 스스로 조직을 꾸려 관리한 곳이며, 서적이 팔리며 읽혔던 공간, 즉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배양된 장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리서치한 도라 가르시아는 2016년의 광주에 또 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서점을 세웠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기념비적 유산이 아니라 현재 ‘읽히는’ 책들이 판매되고 사람들이 복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의 재밌는 점이다. 나 역시 이곳에서 루마니아 작가 단 페르조브스키의 드로잉이 담겨 있는 를 구입했다. 제5 전시실까지 이어지는 비엔날레 전시관은 각기 다른 기온과 습도의 기후대다. 제2 전시실에서는 암흑같이 어두운 공간에서 영상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보통 영상작품의 경우 답답하고 좁은 블랙 박스 안에서 감상하게 되는 것에 비해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넓은 암흑의 광장에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누군가를 우연히 마주치듯이 영상작품을 만나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 폴린 부드리와 레나테 로렌스의 영상작품, 실제 자신의 집의 철제 지붕을 종이비행기로 만든 폴로 카세아루의 ‘항쟁’ 등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작품들을 가장 많이 발견한 전시관이기도 했다. 추상 작품들이 모여 있는 제4 전시실에서는 로렌스 아무 함단의 ‘고무 도포 강철’이 인상적이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탄 발사 기록의 음파를 분석하여 시각적으로 구현한 이 작품은 실제로 법정의 판결까지 바꾸며, 예술이 사회에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연히 마주친 김영나 작가는 제4 전시실에 오랜 시간 머물며 본인의 작업처럼 색과 면으로 조형성을 탐구하는 라나 비검(Rana Begum)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번 비엔날레의 전시장은 일종의 광장 같은 느낌을 준다. 갑자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그 막막한 기분이야말로 올해 광주에서 해야 할 경험일지도 모른다.히토 슈타이얼의 책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현대미술은 상표 없는 상표명으로서 무엇에든 부착될 수 있다. 현대미술은 현기증 나는 규제 완화로 붕괴된 혼란스러운 세계를 위한 놀이터이다. 만약 현대미술이 답이라면, 질문은 곧 ‘자본주의는 어떻게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였을 것이다.” 붕괴된 세계를 위한 아름다운 답안지 같은 현대미술 작품들이 넘쳐나는 비엔날레에서 읽기에 매우 적절한 글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사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되는 히토 슈타이얼의 ‘태양의 공장’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히토 슈타이얼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시니컬한 작업을 하는 베를린의 미디어 아티스트로, 햇빛으로 변환되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가상의 비디오게임에 기반한 대규모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구현한 그의 ‘태양의 공장’은 2015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되며 많은 이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광주비엔날레의 오프닝 당일 이 작품은 여전히 설치가 진행 중이었다.(현재는 설치가 완료되어 제1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광주비엔날레에 참석한 작가 그룹 옥인콜렉티브는 이후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펙터클과 완성된 쇼를 보여주는 대신 사회 속에서 예술의 역할과 의미를 묻는 과정형의 비엔날레를 꾸리겠다는 포부 자체는 시의적절하다고 봐요. 그런데 한정된 기간 안에 토론과 회합, 프로그램 중심의 비엔날레를 운영하는 것은 무리한 도전으로 보이는 점도 있었어요. 준비과정에서 할 일이 많아진 만큼, 작품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거나 오프닝 당일에도 설치가 완성되지 못하는 일이 생겼고요. 또한 광주비엔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인 커미션 피를 책정한 것은 놀랍지만, 한국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커미션 작업을 거의 의뢰하지 않은 점이 아쉬워요. 새로운 작업을 만든 유명 해외 작가들에게 시선이 집중됐죠. 저희 역시 골든+세네비의 ‘헤드레스 주식회사’, 히토 슈타이얼의 ‘태양의 공장’, 아데 달마완의 배너 작품 ‘몽유병 주식회사’ 등의 눈에 띄는 작품들을 즐겁게 감상했지만, 옥인콜렉티브 멤버인 이정민 작가의 회화 작업들을 포함해서 한국 작가들의 작업도 눈여겨봐주셨으면 해요.”이들의 말처럼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두드러진 특징은 방대한 커미션 작업이다. 참여 작가의 25%가 이번 비엔날레에서 신작을 선보였고, 이들 중 상당수가 광주에 체류하며 얻은 영감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돌로 정원을 장식하는 걸 좋아하는 광주사람들의 모습에서 재미를 느낀 토미 스토켈(Tommy Stockel)은 광주 지역의 돌을 SD로 스캐닝해 종이로 재구현한 작품 ‘광주 돌’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QR코드를 이용하여 이모티콘으로 다운 받을 수도 있는데, 나 역시 지금 아이폰에서 역동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광주 돌’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폐지를 이용하여 만든 종이 소시지로 일종의 성벽을 쌓은 미하엘 보이틀러(Michael Beutler)의 ‘대인 소시지 가게’는 광주의 대인시장에서 생산된 작품이다. 광주에 머무는 동안 시장 한복판에 위치한 미하엘 보이틀러의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육중한 기계를 이용하는 작업의 과정을 시현해 보여주었다. 말그 대로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야 하는, 순수한 의미의 노동에 가까운 그의 작업은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흥미로운 화두를 던진다.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은 구닐라 클링버그(Gunilla Klingberg)는 아름다운 산세에 파묻혀 있는 의재미술관에서 한국의 풍수 지리와 점술 문화를 탐구하는 작업을 펼쳐 보였다. 최빛나 큐레이터에 따르면, 광주에 머물렀던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시니어들은 왜 그렇게 등산을 좋아하나요?” 알다시피, 광주의 몇몇 미술관들은 등산복 판매 매장이 즐비한 무등산 자락에 있다. 비엔날레 기간 동안 의재미술관, 우제길미술관, 무등현대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도 흥미로운 전시가 펼쳐진다.광주를 떠나기 직전에 들른 포럼에서는 소설가 한강의 낭독회가 열리고 있었다. 올해 초 글이 아닌 아트의 언어, 몸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던 한강은 광주의 아픈 역사를 다루는 소설 를 읽어달라는 비엔날레 측의 청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묘비명에 써달라고 한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문장을 좋아해요. 세계를 껴안기 어렵게 만드는 칼처럼 날카로운 것들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게 예술인 것 같아요. 가끔 제가 라는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사회적 맥락의 작품을 쓸 거라는 상상을 못했던 시절에 쓰게 된 작품이거든요. 이 소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 건 광주의 역사 그 자체예요.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이 소설을 쓰면서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이번 비엔날레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세계와 나,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칼’에 대한 사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