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익의 다큐멘트: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금 일민미술관에서 김용익의 40여 년에 걸친 화업을 돌아보는 개인전 <가까이...더 가까이...>가 열리고 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대안공간운동과 공공미술 등 작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쳐온 발자취는 그대로 한국 현대미술의 계보가 된다. 작품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만큼 글쓰기와 말하기에 애정과 실천력을 지녀온 김용익의 풍성한 언어들은 유의미한 발언으로 기능해왔다. 지난 9월 1일 전시 개막일에 가진 기자간담회와 <바자 아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눈 말들을 통해 시대별 대표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 대한 가이드와 더불어 지난 한국 현대미술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날 녹음기에 담긴 김용익의 말들을 전시실에 따라 인터뷰로 재구성했다. | 김용익,아트,일민미술관

1 전시실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작품이 전시된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전시장 두 벽을 차지한 ‘평면 오브제’다. 주름진 상태의 광목 천 위에 에어브러시로 가짜 주름 자국을 낸 이 개념적인 작품은 김용익을 ‘모더니스트의 기수’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197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큰 세를 떨치기 시작한 단색화의 핵심 인물인 박서보의 사단으로서 전, 전 등 당대의 유명 전시에 초대되며 모더니즘 계열의 막내 세대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학부 졸업도 마치기 전인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김용익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지금의 전>)에서 자신의 브랜드와 마찬가지인 ‘평면 오브제’를 접어서 넣은 종이박스들을 출품해 당대 모더니즘 미술에 단절을 선언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1981년 제1회 전의 일화는 이후 곧잘 인용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전시에서 그 작품을 보니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평면 오브제’로 뭐랄까요, 갑자기 떠버렸죠.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 작가로 선정되고, 한국과 일본에서의 개인전 등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는데 제 안에서 계속 드는 생각은 첫째로 더 이상 자기복제를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어요. 당시 현대미술이 붐이었는데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작가들을 보면 개인마다 자기만의 브랜드를 갖고 있더라고요. 누구는 이런 작업, 누구는 저런 작업 딱 정해져서는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려고 하면 선배들이나 전시 주최 측이 암묵적으로 ‘원래 하던 걸 가져와’ 하는 분위기였죠. 그게 저로서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미술 외적인 사회의 상황도 암울했죠. 1979년에 박정희가 암살됐고 1980년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군부독재정권의 탄생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어요. 이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 속에서 현대미술의 매체와 형식을 실험하고 모든 미학적 관심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저는 실존적인 흔들림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김용익의 다큐멘트: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지금 일민미술관에서 김용익의 40여 년에 걸친 화업을 돌아보는 개인전 가 열리고 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대안공간운동과 공공미술 등 작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쳐온 발자취는 그대로 한국 현대미술의 계보가 된다. 작품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만큼 글쓰기와 말하기에 애정과 실천력을 지녀온 김용익의 풍성한 언어들은 유의미한 발언으로 기능했다. 지난 9월 1일 전시 개막일에 가진 기자간담회와 와의 인터뷰에서 나눈 말들을 통해 시대별 대표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 대한 가이드와 더불어 지난 한국 현대미술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날 녹음기에 담긴 김용익의 말들을 전시실에 따라 인터뷰로 재구성했다. 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런 작품은 더 이상 그만하자, 공식적으로 선언한 게 제1회 전이었던 겁니다. 전시 전날 부들부들 온몸이 떨리고 걸으면서도 땅을 딛고 있는지 구름 위에 올라 있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되고 두려운 상태에서 전시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그런 작품을 한다는 건 미술 정치판에서의 자살 행위와 같은 것이었으니까요.그 말은 박서보 사단과의 결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박서보 화백과 어떻게 지내시나요? 저 때문에 서운하셨을 겁니다. 1985년 한 월간지에 ‘넘어서기 힘든 거대한 산’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잡지에서 박서보 특집을 다루기로 했나 봐요. 선생님이 편집장에게 “김용익한테 나에 대한 회고록을 받으라”고 했던 모양이지요. 처음에는 제가 거부했어요. 화가 나셨겠죠. 근데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니거든요. 유홍진 씨가 당시 편집장이었는데 또 전화가 온 거예요. 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해서 쓰게 됐는데 사실 그 제목은 유홍진 씨가 붙인 제목이에요. 저는 그냥 ‘박서보 선생님을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근데 뭐 맞는 얘기입니다. 제가 그분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주량부터 그렇고요. 그리고 아마 수명도 그분을 넘어서지 못할 겁니다.(웃음)그 당시 모더니즘의 개념은 ‘전후 한국 사회에서 단색조의 모노크롬 회화를 내세우며 이론적·제도적 헤게모니를 구축한 추상회화’라는 특수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더니즘은 예술이 사회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음을 강조했는데 현실을 외면하기에는 너무도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개념적인 엘리트주의의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결별을 선언한 것인가요? 그때 당시에 ‘세상이 이러니까 내 작품을 바꿔보겠어’라고 의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전 의식과 존재와 실존이 마구 흔들렸다고 할까요? 그랬던 것이 저런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나,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결과로서 유추해보건대 당시의 정치적 격변이 내 무의식 속에서 의식 전체를 흔들어놓았다는 결론입니다. 그때에는 그저 답답하고 이대로는 성에 차지 않는 숨이 막힌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단색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계열의 선배 작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실망스러운 행태들을 많이 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부상한 단색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너무나 흑역사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웃음)그 말은 예술가의 삶과 작업을 따로 떨어뜨려 평가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구별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점에서 부정하지 않느냐면,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은 사실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예술가의 경우 이런 측면, 저런 측면, 무수한 측면 가운데 일부만이 작품에 반영되어 나오는 거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과 예술작품이 일치될 수 없다는 게 정답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걸 부정하고 싶습니다.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어요.2 전시실1990년대, 김용익은 대표작인 ‘땡땡이 회화’ 시리즈를 다수 제작했다. 캔버스 위에 원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한 이 작업들은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과 닮아 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캔버스 구석에 작고 희미하게 적어놓은 글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작품을 일부러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염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작품에 작가는 ‘가까이...더 가까이...’라는 명제를 달면서 ‘말 그대로 가까이 다가와서 봐달라’고 주문한다. “얼핏 보면 내 작품은 단순한 ‘땡땡이’ 무늬이거나 미니멀한 평면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가는 선, 글씨, 얼룩 등이 드러나면서 우리의 처음 시각을 미끄러뜨린다.”(, 김용익) 작가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모더니즘의 인증된 이미지 권력에 흠집내기’를 시도하며 자신의 태도를 드러낸다.거의 모든 작품에 깨알같이 많은 글들이 적혀 있습니다. 이 글들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문장이 있을까요? 제작 연도가 1994~2013년으로 된 ‘가까이... 더 가까이...’가 있습니다. 1994년에 네모를 그리는 작업을 하다가 2012년에 전시를 하면서 배송을 해야 하니까 비닐 포장을 했습니다. 포장한 채로 그 위에 글을 남기고 포장지 자체를 흡수해서 지금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난 결코 과격하지 않아’라고 써 있는데 이게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저는 결코 과격한 아방가르드 아티스트가 아닙니다. 젠틀하죠.(웃음) 얼핏 과격해 보이지만 그래 봤자 미술 안에서 벌이고 있는 게임일 뿐이죠. 제 책에도 썼듯이 모더니즘에 정면으로 반격하여 뒤엎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의 내부에 균열과 파열구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모더니즘은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오직 균열과 파열구를 열어 숨 쉴 공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선택입니다. 그런 의식이 항상 저한테 있어요. 그게 제 예술의 한계이고, 예술 일반의 철학적 한계이기도 해요. 제아무리 예술 안에서 과격함을 주장하고 전복을 꿈꾸어도 그것이 예술 안에서 재영토화되고 재맥락화되고 재전복을 요구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연극이 실제, 리얼을 꿈꾸어도 그것이 무대에 올려져 조명을 받는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연극이라는 영토 속에 속할 수밖에 없듯이 결국 “예술은 관객과 예술가가 벌이는 지적 게임”이라는 마르셀 뒤샹의 말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전 절대 과격하지 않다는 것, 이것은 게임이라는 것 입니다.‘절망의 완수’ 시리즈는 어릴 적에 여러 겹의 크레파스를 칠하고 가느다란 철사 같은 것으로 긁어서 완성시키는 그림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 검은 그림들조차 한 귀퉁이에는 글을 적어놓았습니다. 이 작품들은 제 건강과 관련이 있는 심각한 작품들입니다. 몸이 굉장히 아팠습니다. 저는 ‘모더니즘병’이라고 생각했죠. 제가 이해하고 있는 모더니즘과 현실, 나의 삶과 현실 사회의 괴리가 너무 커서 계속 아팠어요.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자기폐쇄성이 있습니다. 미술 안에서 미술을 생각하고, 예술 안에서 예술이 논의되는 자기폐쇄적 요소.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라는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모더니스트로서의 자기폐쇄성을 내면화하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병이 난 겁니다. 거기에 미술에 대한 혐오와 애증이 교차하면서 그동안의 것들을 자꾸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전체를 시커멓게 지우는 게 아니라 격자무늬를 만들어서 지우고 어느 일부분은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죠. 모더니스트의, 예술 게임의, 끝내 이 기질을 못 버리는 순종적인 모습이 남아 있는 거죠. 그렇게 혐오가 일면 그냥 다 지워버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걸 왜 격자무늬로 지우고 있을까, 그 사이에 남겨놓은 글은 또 무엇이며, 뭐 그런 겁니다. 발단은 절망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나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예술가로서의 게임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글이라는 것은 어떤 도구였습니까? 페이스북이나 책에 쓴 글과 작품에 들어간 글이 다른 종류의 것인가요? 본질적으로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작품과 글, 작품 제작과 글쓰기를 동등한 무게로 보고 있어요. 작품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만큼 글을 쓰는데도 똑같이 투자하고요.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표현보다는 ‘미술인’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이며 아트 신에서 유의미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를 전달하는 것과 글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 방식은 다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은 똑같습니다.자기 작품에 대해 이토록 열렬하게 설명을 더하는 작가는 처음 보았습니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얘기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제 성향과도 맞지 않고요. 제 안에 있는 글쓰기와 말하기 욕망이 저를 끌고 간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어릴 적부터 글쓰기가 좋았고 미술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미술에 대해서 생각하고 쓰는 걸 더 좋아했기에 주로 쓰고 틈틈이 작업했다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책 읽고 글 쓰다 시간이 나면 머리 식히려고 작품을 했거든요. 그래서 작품 수도 많질 않고요.(웃음)3 전시실최근 김용익은 지난 40년간의 작업들을 재제작하고 있다. 지난 작품들을 덧입히는 것을 넘어서 그 작품들을 관 형태의 나무 상자에 봉인하고 그 위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도상과 글을 덧붙이는 제의적 행위에 집중한다. 지난 시간 동안 한결같이 자신을 반성적으로 점검해온 미술인의 마지막 스텝 역시 지난 여정을 돌아보는 일로 맺음되고 있다.3전시실 입구에는 손상된 작품의 일부와 포장재를 이용한 설치 작업이 있습니다. 작품 제목도 써 있지 않고 구석에 자리해 아직 전시 준비가 덜 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내 작품의 키워드는 ‘애매성’입니다. 1980년대로 돌아가서 모더니즘과 결별하고 방향을 180도 돌려 민중미술에 호감을 표했을 때 그쪽에서도 거의 10여 년 동안 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전근대적인 사고나 행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말이 되는 세계로 넘어오고자 하는 민중미술의 생각에 호감을 갖고 있었고, 당시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권위적인 미술의 구질서를 전복시키고 싶다는 점에서도 그들과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저에게 ‘애매성’이라고 하는 게 작업의 키워드로 떠올랐습니다. 그 이후 쭉 제게 중요한 키워드였고 이번 전시에서는 이 작품으로 구현시켜봤어요. 제목도 없고, 화이트 큐브라고 하는 미학적 권력이 잔존하는 모더니즘 공간에서 가장 권력이 덜 미치는 구석에, 이것이 작품인지 아닌지 아무 설명이 없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애매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을 가져다 놓은 겁니다. 이런 연출된 애매성이 제 정체성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이 전시실에 있는 삼면화를 유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이 작품이 작년에 완성되었고 올해도, 내년도 왕성하게 작업을 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저의 유작, 마지막 작업입니다. 왜냐면 요즘에 하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1980~90년대 만든 작품들을 재생산하거나 재제작하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작업은 반복에 의한 차이가 무엇인지 조금씩 발견하는 것이죠. 이 작품은 풍경화, 개인전 카탈로그, 대학교 때 그린 자화상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삼면화라는 형식 속에 넣었어요. 이것도 일종의 관입니다. 망자를 지옥에서 구원해 올리는 지장보살도 그려 넣었고, 노잣돈 쓰라고 동전도 넣었고.... 여기 써놓은 텍스트는 유독 심각하죠?(웃음) 삼천개벽, 후천개벽 다 나오고 “디스토피아 시대에는 새로운 창작은 불가능하다. 오직 편집만이 가능하다.” 이런 얘기 나오고. 그 생각에는 여전히 동의합니다.예전에 쓴 글을 보면 “내가 나의 작품을 짐짓 함부로 다루는 것도 이러한 배려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흙 묻은 그림’ 같은 작품은 몇 년간 작업실 처마 밑에 내놓아 제목처럼 그림 밑은 흙물이 들었어요. 왜 이렇게 작품들을 고생시키세요?(웃음) 그 작품의 고생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원래는 파란색 땡땡이 작업으로 이루어진 그림인데, 일 년간 밖에 내놔서 밑이 다 썩었어요. 그 상태로 윗부분에 금박 장식을 붙여 종교적인 분위기를 더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작품에 낙서를 해놓은 겁니다. 중간에 빨간색과 파란색 낙서가 보이죠? 나중에 CCTV를 찾아보니 애는 막 낙서하고 있고 부모가 그 모습을 사진 찍어주고 있었다는군요. 미술관에서 깜짝 놀라서 저에게 연락이 왔는데 제가 “이제 작품이 완성됐네요.” 했어요. 그리곤 액자에 집어넣었죠. 이 또한 관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며 이런 질문을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사람은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피곤한 사람입니다. 모더니즘에서 민중미술로 또 공공미술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반성하며 미술인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런데 피곤하지 않으세요?(웃음) 최근에 제가 지금까지 미술인으로 살아오면서 느낀 제 마음을 담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민중미술이 결국 자리바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공공미술에 몰두하며 잠시나마 건강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결국 공공미술에 대해서도 실망을 하면서 휩싸인 오늘날의 피로감을 생각하다가 이제 내 나이도 일흔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저는 ‘말이 되는 미술’을 추구해왔거든요. 모더니즘에서 공공미술까지 제가 고민해온 미술은 강박적으로 말이 되는 미술이었는데 이제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 가볍게 살고 싶어요. 일흔이나 되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해도 누가 나를 욕하지 않겠지? 나 이제 말 안 되는 미술 속으로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어. 뭐 그런 얘기들을 썼죠. 3 전시실에 있는 LED 작품도 그래서 해본 겁니다. 왜 말도 안 되고 맥락 없는 작품을 했죠? 그냥 하고 싶어서 했는데 안 돼?(웃음) 앞으로는 모던적 주체의 무게에서 나를 좀 내려놓고 가볍게 가볍게, 경쾌하기 짝이 없고 의미를 읽을 단서조차 주지 않는 그런 작품을 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