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소한 재미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배우 길은혜가 꿈꾸는 연기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사적인 재미를 계속 발견해가는 일이다. 천천히 묵묵하게, 사소한 즐거움이 때론 전부일 수 있다고 믿으면서. | 인터뷰,길은혜

심성 고운 주인공보다도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악역에 마음이 갈 때가 있다. 가끔은 악행 속에 이면이 엿보이기도 하고 무조건 착한, 그래서 답답증을 유발하는 주인공에게 못된 말을 퍼부을 땐 속이 다 시원하다. 세상 남자는 모두 주인공 편인지라 아무리 머리 굴려도 되는 일 하나 없는 악녀라면 더욱 그렇다. KBS 일일드라마 에서 길은혜가 연기하는 ‘강삼월’이 바로 그런 경우다. 자신보다 뭐든지 월등한 한 살 터울의 고모 ‘강단이(이시아)’와 매사 비교 당하며 자랐고 엄마는 사사건건 “읍내에서 경리일 같은 거나 하지, 왜 헛꿈을 꾸냐”며 면박 주기 일쑤다. 게다가 그 예쁘고 똑똑한 고모 때문에 아버지를 잃기까지 했다. 이런 환경에선 삐뚤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유치한 거짓말과 이간질을 일삼으면서 성공을 바라고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강삼월의 모습은 언제나 올곧기만 한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측은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극 속에서 한창 질투와 ‘열폭(열등감 폭발)’ 중인 강삼월, 길은혜 역시 동의했다. “삼월이 불쌍하죠? 악역이지만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서 연기하는 데 어렵지 않아요. 게다가 삼월이의 나쁜 짓엔 허술한 구석이 있잖아요. 20% 부족해서 귀여운 느낌이에요.”사실 그렇다. 이제까지 길은혜가 연기한 악역에 비하면 강삼월은 깜찍한 편이다. 드라마 에서는 계급사회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우등생 역할로 ‘일진보다 무서운 괴물’ 소리를 들었고 의 ‘조아라’는 우아하게 다른 이들을 조종하는 ‘치명적 악녀’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영화 에서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성장하는 채수연(심은하)의 아역으로 데뷔하지 않았나. 이쯤 되면 나쁜 짓에 지칠 만도 하다. “처음 악역을 했을 땐 평소에 표현하지 못했던 걸 다 쏟아내는 게 재미있었어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얘기니까, 오히려 ‘악플’이 더 반갑고 욕먹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외로워요. 그리고 캐릭터의 감정을 가지고 연기를 하다 보면 미운 표정이나 인상이 남게 돼요. 그렇게 이미지가 고정될까 봐 걱정스럽고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몸을 사릴 때가 있더라고요. 너무 미움만 받으니까.”어쩌면 길은혜에게 연기란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보통의 신인 연기자, 아니 대부분의 배우 인터뷰에서 연기는 좋아서 하는 일이자 대단한 열정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길은혜는 “욕심 없이 시작한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애초에 연기학원에 다녔던 것도 소극적인 성격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고 우연히 오디션에 합격해 데뷔한 후 아역 연기자로 활동한 이유 역시 그저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연에 발탁되고도 하기 싫은 마음에 책 읽듯 대본 리딩을 하다 잘린 적이 있는가 하면 스무 살이 넘어선 결국 평범한 회사생활을 선택할 정도였으니, 어쩌다 시작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한동안은 괴로운 길이었던 모양이다.“성인이 돼서도 고민이 많았어요. 끼도 없고 남들 앞에서 자유롭게 표현하는 걸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사실 이제 난 이쪽 길이 아닌가 보다, 라고 마음을 접었을 때 오디션을 보게 된 거죠.” 작은 배역이었지만 을 본 사람들은 길은혜를 향해 신나게 욕을 퍼부었다. 그녀 말마따나 그건 악역에게는 되려 칭찬이고 가능성에 대한 반증이었지만 정작 길은혜를 고무시켰던 건 자그마한 스포트라이트보다는 개인적인 발견이었다. “은 다 비슷한 또래에 인지도도 엇비슷한 친구들이 많았어요. 자연히 경쟁 구도가 생기면서 상처 받는 일도 늘어났어요. 근데 괴롭지만 그걸 연기로 승화시키는 놀라움이 있더라고요. 독기라곤 전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작품 하면서 ‘아, 나도 독한 면이 있나?’ 처음 깨닫게 된 거예요. 배우 하기엔 너무 약하고 견뎌내지 못할 거라고 지레 겁먹었는데 조금씩 강해지고 있는 걸 스스로 느껴요”솔직히 말하면 연기가 재미있어졌으면 좋겠어요. 연기라는 게 정답이 없으니까 자기 확신을 갖기가 어려워요. 확신을 갖다가 무너져도 보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막 신나서 연기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결국 길은혜가 말하는 연기의 기쁨이란 수행으로 얻는 정신적 성취감과 닮아 있다. 끈기 어린 ‘노동’이야말로 사람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듯, 조금씩 상처를 덜 받는 법을 체득하고 정신을 단단하게 만들면서 본인 혹은 누군가와의 관계에 대한 시야를 넓혀가는 일. 그리고 커다란 동요 없이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버텨내는 법을 배운 것이다. “조급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에요. 빨리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다거나 하는 건 둘째 문제고 이건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이러다 아무것도 안 들어오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저는 항상 늦었어요. 대학교도 마지막까지 애를 태우다 합격했고 남들보다 철도 늦게 드는 것 같고요. 뭐든지 한 방이 아니라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가는 타입인 거죠. 전의 미니시리즈도, 지금 일일드라마도 모두 일종의 준비 과정처럼 느껴져요.”실제로 만나보면 알 테지만, 브라운관 속 화려하고 도도한 모습과는 달리 길은혜는 천진한 인상을 풍긴다. 무표정일 땐 서늘하다가도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렇게 수줍어할 수가 없고(그녀는 비공개 인스타그램 계정의 소유자다) 인터뷰 내내 생각을 곱씹고 주저하면서도 결국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극과 극의 두 얼굴을 보면서 자연히 앙칼진 역할만큼이나 정통 멜로 속 순애보나 시트콤의 사랑스러운 허당 캐릭터 역시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꼭 착하거나 사랑스러운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드라마 속 악녀는 늘 짝사랑하는 쪽이잖아요. 극에서도, 극 밖에서도 사랑 받고 싶더라고요. 데뷔한 지 10년이 넘어서야 조금씩 욕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슬며시 비추는 욕심, 결국 뜨겁지는 않아도 미지근하게 오래도록 연기하고 싶다는 ‘꿈’은 이젠 연기에 재미를 느끼게 됐다는 결론인 걸까? 길은혜가 차분하고 신중한 특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답했다. “재미... 재미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연기가 재미있어졌으면 좋겠어요. 연기라는 게 정답이 없으니까 자기 확신을 갖기가 어려워요. 아무래도 내 안에서 더 확고하게 정립을 해야 하고 어느 정도 대중의 인정도 필요하겠죠. 확신을 갖다가 무너져도 보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막 신나서 연기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