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가 만든 논픽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만인의 연인, 지진희가 드라마 <끝에서 두 번째 사랑>으로 돌아왔다.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 유연하게 소신을 지켜가는 법에 대해 그가 들려준 논픽션. | 인터뷰,지진희

여기는 드라마 2회분 야외 촬영장. 스태프들이 울퉁불퉁한 돌무덤 위로 투박한 매트리스를 일사불란하게 깔고 있다. 그 옆에서 어두운 낯빛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꽃중년의 아이콘이자 ‘아재파탈’의 본좌 지진희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인파를 뚫고 그가 몸을 던진다. 이 한 마디만 남긴 채. “비켜!”이 드라마는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로 회자되고 있다. 강물에 뛰어들고, 분수에 빠지고, 대차게 비를 맞고. 심지어 지진희는 드라마 시작 전 코가 부러지는 큰 부상으로 인해 뭇 사람의 심장을 덜컹하게 했다. 코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튜디오 분장실이 병원 진료실로 순간이동한 듯 지진희가 턱을 들고 코를 보여준다. “액션 신을 찍다가 주먹에 정통으로 맞아서 코가 비뚤어진 거예요. 콧구멍 안으로 쇠꼬챙이를 넣어 부러진 뼛조각을 맞추는 수술을 받았어요. 그래도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그런 거라 너무 다행이죠. 드라마 중간에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요?” 걸어 다니는 ‘긍정의 힘’이란 말은 역시나 헛소문이 아니었다. 지진희는 지극히 반듯하고 점잖은 이미지 뒤에 사색적이고도 엉뚱한 측면이 다분했다. 중학교 때까지 혈액형이 A형인 줄 알고 친부모님을 찾아 나설 생각을 했다거나(그는 진지했다), 그러다가 군대에서 B형임을 알았던 순간부터 인생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알쏭한 이야기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사실 이것이 고차원적인 “유머인가?” 갸우뚱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사전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의 취미는 ‘생각하기’다. 지진희는 코 부상으로 치료를 받으러 2주 동안 병원을 왔다갔다하면서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오히려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게 됐나?”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생각했다. “이번에 다치면서 교훈을 하나 얻었어요. 약간의 긴장감은 있어야 하는구나. 리허설을 많이 해서 너무 마음을 편하게 놓고 촬영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아직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하나 있다. 김희애, 지진희 중년의 두 배우가 열연 중인 이 드라마는 액션물이 아니라 로맨틱코미디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길 바라는 여자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원하는 남자가 티격태격하다 케미스트리가 일어나는 이야기다. 지진희는 지난 2014년 , 2015년 그리고 이번 드라마 역시 중년의 사랑과 삶을 그려낸 작품을 만난 것에 대해 ‘행복’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동안 우리 또래의 인물들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사실 많지는 않았어요. 그 점이 참 안타까웠는데 세 번째 작품까지 연달아 거의 제 나이 또래의 인물을 연기하고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요.”지진희는 올해로 마흔여섯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이번에 맡은 배역 고상식도 정확하게 같은 나이다. 이름 석 자만 발음해봐도 감이 오듯 단추를 목젖까지 꽉 채운 셔츠 차림처럼 여유와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굉장히 철두철미한 사람이에요. 과거의 어떤 상처 때문에 더 이상 피해를 보고 싶어하지 않죠. 그런데 또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고요.” 여기까지는 픽션의 인물. “무엇보다 가족을 지키려는 힘이 굉장히 강해요.” 이 부분은 논픽션, 지진희와 비슷하다. “고상식은 좀 심한 수준이고(웃음) 저는 적당한 수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 나이 또래 남성들이 굉장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요즘 신조어로 대두되는 노무족(No More Uncle, 세련된 외모와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중년층), 그루밍족(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들), 주백남(주말에 백화점 가는 남자), 이 단어 사이 사이에 지진희가 있다. “정장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늘 입고 다니는 정장이 별로 예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조금만 신경 쓰면 정말 예쁘게 입을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웠어요. 사실은 정장처럼 섹시한 옷이 없는데 말이죠.(웃음)”우리는 드라마 속 고상식의 스타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진희는 이번 드라마에 들어가기 전부터 의상을 비롯해 가방, 시계, 자전거까지 본인이 직접 고르고 구매하는 열의를 보였다. 심지어 이번 드라마의 헤어스타일은 자전거를 탈 때 바람에 휘날리는 모양까지 계산하고 디자인한 것이다. 블랙, 네이비, 그레이 등 드라마에 등장하는 예닐곱 벌의 정장을 직접 맞춤 제작했고 드라마를 위한 가방을 이탈리아에서 공수 받기까지 했다. 그는 이번 드라마를 위해 차곡차곡 수집해온 해외 스트리트 패션 스틸 컷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보여주었다. 덴마크 출장 중에도 “바로 저거다 저거! 고상식은 저런 모습이어야 해!”를 외치며 셔터를 눌렀을 모습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야말로 지테일(지진희+디테일)이 따로 없었다. 홈쇼핑 방송의 쇼호스트가 된 듯, “공무원이지만 늘 똑같은 옷이 아니라 아주 조금의 변주만 주어도 폼이 날 것 같았거든요.” 너스레를 떠는 그의 모습이 낯설고도 정겨웠다.정장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늘 입고 다니는 정장이 별로 예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조금만 신경 쓰면 정말 예쁘게 입을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웠어요. 사실은 정장처럼 섹시한 옷이 없는데 말이죠.사실 요즘 미디어를 통틀어 빈번하게 소비되고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중년의 남성을 지칭하는 ‘아재’다. 이들은 밑도 끝도 재미도 없는 말장난의 상징인 ‘아재개그’로 희화화되거나 아재라는 두 글자에 ‘꽃’이나 ‘미(美)’처럼 중화시키는 단어가 덧붙여져 멋진 중년의 이미지로 진화시키려는 두 가지 측면으로 양분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지진희는 서른 살 늦깎이로 데뷔해 본인 나이 또래 그대로의 이미지 안에서 신사적이고 도시적인 중년 남성을 상징하는 배우로서 필모그래피를 탄탄하게 쌓아왔다. 의 듬직한 종사관 나리, 의 다정다감한 숙종, 의 의젓한 의사 은호 등, 수십 편의 작품에서 사극과 현대극을 넘나들며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주는 키다리아저씨 그 자체가 되었다. 지진희는 10여 년 넘게 연기생활을 해오면서 이상적으로 나이 들어가는 중년의 어떤 모습을 대변해오고 있다. 최근엔 부쩍 두 여자를 마음에 품는 흔들리는 중년의 모습으로 분하곤 했는데 불륜이란 다소 자극적이고 논쟁적인 소재 역시 그가 연기하면 마냥 비난 받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는 현상도 나타났다.이번 드라마에서 그는 사별한 남자를 연기한다. 상처가 있긴 하지만 사랑에 주저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절제해야 하는 상황 속에 놓인다. “좀 더 어렸을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단순하게 결정 내릴 수 있죠. 그런데 제 또래가 되면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참 많아져요. 고상식이 공무원이 된 것도 사실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 뭔가’ 하고 찾다 보니 결국 공무원이 된 거죠.” 지진희는 조금 그을려 있었고 야위어 보였다. 드라마 촬영이 한창 진행 중임을 의미했다. 직업으로서의 배우, 지진희의 생각은 이렇다. “연기는 그저 직업이에요. 제게는 가정을 꾸리고 삶을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해요. 가족이 연기하는 걸 원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거예요. 연기하는 것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래야 사람들이 절 찾게 되고 그래야 우리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드라마 3회에서 고상식이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는 내 가족! 건들지 말라고!” 버럭 소리 지르는 장면이 오버랩됐다. 이번 드라마에서 지진희는 빠른 호흡의 속사포 대사를 쉴 새 없이 내뱉는다. 실제로도 인터뷰 내내 그는 마치 뒤에서 뭐가 쫓아오는가 싶을 정도로 돌진하는 기관차처럼 말을 쏟아냈다. “사실 옛날에 저는 말이 거의 없었어요.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묵언수행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20대 때는 말 때문에 사람들이 싸우게 되고 세계평화가 깨진다고 생각했던 거죠.(웃음).” 말을 빨리 하는 이유는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고 싶어서”란다. “그리고 요즘 드라마 자체의 템포가 빨라지고 있어요. 엄청난 스피드예요. 노래도 랩도 빨라지는 것처럼 그만큼 시대가 빨라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컷 진행도 빠르고 대사도 빠르죠. 감독님께서 요구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반면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는 짐 자무시 감독의 이란 영화다.지진희는 요즘 새로운 맛을 알아가고 있다. “음식을 완전 좋아해요. 제가 생각해도 완전 미식가예요.(웃음) 옛날엔 달짝지근한 불고기가 좋았다면 요즘엔 양념이나 간을 하지 않은 본연의 맛이 좋아져요. 육사시미도 좋고 꽃등심도 너무 맛있고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사태를 푹 삶아서 그냥 툭툭 썰어 먹는 거예요.” 한때 보험광고의 모델이었던 그는 요즘 한우홍보대사, 우유와 그릇 브랜드의 얼굴로 활약 중이다. 문득 맛에 대한 호기심과 탐미가 이 사람의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근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진희는 운동도 하나만 하면 지겨워지기 때문에 클라이밍, 야구, 골프, 달리기 등 여러 가지를 골고루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정말 부지런하셨어요. 그건 타고나는 것 같아요.”레고를 시작한 건 아이들과 같이 놀고 싶어서 그랬어요. 아이들과 평생을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특히 남자 아이들은 어느 순간 아빠와 거리가 멀어질 수 있어요.그의 또 다른 취미는 레고다. “레고를 시작한 건 아이들과 같이 놀고 싶어서 그랬어요. 아이들과 평생을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특히 남자 아이들은 어느 순간 아빠와 거리가 멀어질 수 있어요.” 지진희는 레고를 만들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사물을 볼 때 옆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올려서 보고, 내려보고 또 돌려서도 봐. 한쪽만 보면 안 돼. 네가 못 보는 부분이 항상 있어. 그걸 볼 줄 알아야 해.” 금속공예를 했던 그는 뭐든 손으로 만드는 것에 능하다. 어린 시절엔 무엇이든 손으로 만져보고 부숴보고 분석해야 직성이 풀렸다. “혼자 있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가 생각해봤더니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었던 시간이 많았어요. 그 시간이 저한테 굉장히 큰 경험이었고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시간이었어요. 혼자 있으니까 늘 무언가 만들게 되는 거죠. 뭘 만지고 깎고 붙이고 그러다 손을 베는 일도 있는데, 이런 행위들이 너무 좋은 거예요.”그러면서 요즘엔 “글을 너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못 써요.(웃음) 시나리오 작업도 해보고 싶은데 아무리 써보려고 해도 못 쓰겠더라고요. 아이디어는 머릿속에 많이 있어요.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제가 연출을 하면 어떨까 계속 생각을 발전시켜보고 있어요.“ 드라마 밖으로 튀어나온 배우 지진희가 그리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판타지에다 반전이 조금 있습니다.” 그가 설계한 세계는 픽션보다 낯선 세상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