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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희천이 이제서야 생성형 AI를 택한 이유

생성형 AI로 만든 신작 ‘말린’부터 처음 공개하는 사진 작업까지. 서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두더지들’에 그 답이 있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6.10.14

FRAGMENTS


2015년 “세상은 스크린이 되었다” 말하던 작가 김희천에게, 더 이상 스크린의 존재 유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크린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중요한 건 몇 장의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AI 앞에 앉아 조각난 미래를 더듬는 일, 그리하여 당도한 미래와 그 안의 나를 발견하는 일, 그뿐이다.


전시 «김희천: 두더지들»은 작가 김희천의 지난 3년을 정리하는 자리에 가까워요. 먼저 2023년 게임 엔진으로 만들었던 영상 <커터 3>와 <더블 포저>가 있습니다. 올해는 이 두 작업에서 이스터 에그로 등장했던 두더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상 <레몬>과, 처음 시도하는 생성형 AI 비디오 작업 <말린>을 작업해 함께 선보였어요.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보여줄 생각이었다는 듯 모든 작품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전시에 있는 작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본다고 하면 최소 2시간 반은 걸릴 거예요. 전체 듀레이션이 너무 길다는 생각도 들지만, 영상 작업을 하는 작가의 숙명이겠죠. 일단 상대적으로 국내 관람객에게 보여줄 기회가 적었던 <커터 3>와 <더블 포저>를 꼭 함께 두고 싶었어요. 모두 게임 엔진으로 만들었지만 작동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요. <커터 3>는 랜덤으로 돌아가는데 두더지는 시간 순서대로 등장하고, <더블 포저>는 시간 순으로 돌아가지만 두더지는 랜덤으로 나오죠. 게임 엔진이 아니라면 구현하기 어려운 방식이에요. 그런데 두 작업을 만들고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수 없다면, 일반 영상 작업과 뭐가 다르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저는 두더지야말로 이 작업이 게임 엔진 기반임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했는데, 알아차리기 턱없이 부족했던 거죠. 그렇다면 아예 두더지를 주인공 삼은 작업을 해보자, 그래서 <레몬>을 만들었어요. 세 개의 작업이 비로소 하나의 완결된 시리즈로서 마무리된 거죠. 서서울미술관은 여러 전시실로 나뉘어져 있는데, 여기서 끝내기엔 비어 있는 다른 전시실이 아쉽더라고요. 하지만 더 이상 게임 엔진으로는 뭘 만들고 싶지 않았고.(웃음)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생성형 AI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죠.


김희천, <커터3>, 2023, 게임 엔진(유니티)으로 제작된 자동 재생 게임, 60fps, 가변비율, 사운드(스테레오), 국립현대미술관 제작 지원.

김희천, <커터3>, 2023, 게임 엔진(유니티)으로 제작된 자동 재생 게임, 60fps, 가변비율, 사운드(스테레오), 국립현대미술관 제작 지원.

그렇게 만든 것이 <말린>이죠.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인 주인공 ‘찬종’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사관으로부터 영상이 AI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촬영된 것임을 증명해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이 모든 걸 생성형 AI로 만들었고요. 전부터 3D, VR, 페이스 스왑처럼 동시대 가장 화제가 되는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업을 해왔는데요, 생성형 AI 작업은 왜 이제서야 시도한 건가요? 이미 온라인상에는 생성형 AI로 만든 밈이 돌아다니고 있을 만큼 대중화된 기술인데요.

말씀주신 이유로 <말린>은 시작이 참 어려웠어요. 곧 저희 엄마도 생성형 AI로 웃긴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고, 발전하는 속도도 너무 빨랐죠. 소화할 시간도 없이요. 무엇보다 AI 영상 생성 모델인 ‘시댄스 2.0’ 이전의 것들은 한계가 너무 명확하게 보였어요. 작가로서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요. 근데 지난 4월에 발표된 시댄스 2.0이라는 모델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인 거예요. 몇 가지 프롬프트만 넣으면 15초짜리 컷이 4개로 나눠진 영상을 한 번에 만들어주는데, 톤은 모두 일관되어 있어요. 영화에서 말하는 몽타주 기법이 쓰인 것처럼요. 이제는 이 기술이 아예 다른 챕터에 들어섰구나, 싶더라고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일단 작업해봐야겠다 생각했죠.

리플렛에는 전시를 시작하기 한 달 전쯤 진행한 인터뷰가 실려 있어요. 그때만 해도 이번 작품에는 자신을 작업에 등장시키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있던데, <말린>의 찬종은 어느 순간 배우 이찬종에서 당신이 되어 있습니다. 왜 마음이 바뀐 건가요?

그렇게 말했던 건, 제 이미지로 생성된 화면을 봤을 때 자꾸 ‘가능한 김희천의 범위’ 안 어디쯤에 있는지가 보인다는 이유였어요. 장면 선택이 어렵기도 하고, 좀 찝찝하달까요. 근데 <말린>을 50% 정도 만들었을 때 위기가 왔어요. 갑자기 이게 뭔가, 싶은 거죠. 이게 미술이야?(웃음) 그렇다고 영화도 아니고. 2시간 반짜리 영화의 초반 10분 정도 본 것 같은 기분. 큰일 났다. 어쨌든 미술로서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여러 방식을 고민하다 저를 넣어봤어요. 영화적이지 않게, 뻔뻔하게, 느닷없이 찬종은 제가 되어 있죠. 이번에는 찝찝함보다도 재밌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영상 말미에 두더지가 사람의 옆구리를 찢고 들어가는 끔찍한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건 도저히 배우의 얼굴로 못 만들겠는 거예요. 사실 관객들은 영상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잖아요. 배우인지, 작가 친구인지, 가족인지. 애초에 그런 질문 자체가 안 생길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가 나오는 순간, 적어도 하나의 질문은 나올 거란 말이에요. ‘자기는 안 넣겠다고 하더니, 왜 넣은 거야?’ 작가가 자신을 작업 전면에 등장시킨다는 건 큰 제스처잖아요. 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거예요.


김희천, <레몬>, 2026, 게임 엔진(유니티)으로 제작된 자동 재생 게임, 60fps,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김희천, <레몬>, 2026, 게임 엔진(유니티)으로 제작된 자동 재생 게임, 60fps,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메인 스크린 주변으로 보이는 3개의 세로 스크린 영상 역시 AI로 만들어졌어요. 자연 풍경이나 동물이 등장하죠. 그런데 크레디트에 ‘우연히 포착’ 같은 문구를 달고 진짜인 척을 해요. 함께 전시를 관람한 친구는 그 영상들이 가짜임을 끝까지 믿지 않았는데요, 이러한 혼선 역시 바라던 것인가요?

오프닝 날, 친한 커플이 와서 <말린>을 보고는 “연기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순간들을 바랐던 건 전혀 아니었지만, 두 분의 충격받은 표정을 보는 게 재밌긴 했네요.(웃음) AI로 만들었다는 걸 숨긴 적은 없는데, 이런 경우도 생기는구나 싶어요. 아주 기묘한 순간도 있었어요. <말린>에 등장하는 여자의 뒷모습은 제 와이프의 이미지로 만든 영상인데, 이미지를 딱 두 장 넣었거든요. 와이프가 가진 습관을 정확하게 보여주더라고요. 새끼손가락을 살짝 드는 모습인데, 그 미묘한 각도와 포즈가 제가 느끼기엔 정확했어요. 소름 돋더라고요. 결과물 자체는 아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데, 그래서 만족스러운데, AI가 이미지 두 장으로 만든 장면이라는 게 참 묘한 거죠.

듣고 보니 기자 간담회 때 생성형 AI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며 자율주행 자동차를 예로 들었던 게 생각나요. 자율주행 자동차가 도로 위에서 끊임없이 다음을 시뮬레이션하듯, 생성형 AI 역시 데이터를 학습해 계속해서 올 법한 미래를 만들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걸 강조했죠. 그러니까,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요.

더 이상 AI로 만든 무언가가 진짜 같냐, 가짜 같냐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냥 시간 문제죠. 중요한 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AI가 어떤 인물의 시선, 그 인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까지 시뮬레이션 했다고 느껴질 때가 정말 많았다는 거예요. 저는 작가로서 다가올 미래를 감각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한 거예요. 로봇을 비롯한 각종 AI 툴처럼 우리 대신 현실을 판단하고 예측할 인공 시스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텐데, 생성 모델을 만져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던 거죠.


김희천, <말린>, 2026, 4채널 비디오, 5.1채널 오디오, 흑백, 컬러, 35분,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김희천, <말린>, 2026, 4채널 비디오, 5.1채널 오디오, 흑백, 컬러, 35분,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또 다른 신작 <레몬>은 훨씬 밝고 명랑하지만 보면 볼수록 잔잔한 외로움과 우울감이 느껴져요. 사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이 모두 그래요. 2년 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스터디>를 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고요. 음울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작업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솔직하게 작업하고 싶어서요. 그러다 보면 숨기고 싶은 부분들을 꼭 넣게 되더라고요. 그건 대체로 우울인 것 같아요. <레몬>만큼은 그런 성격을 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자니 가짜 같아서 마음을 바꿨어요.

“2012년 12월 21일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망조의 것들을 사진으로 모아 놓았다”고, 10년 전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때부터 줄곧 놓지 않았던 사진을 처음으로 전시장에 걸었어요. 사진이 있는 복도를 지날 때 민망해하며 가볍게 봐달라고 했었지만, 사실 사진은 김희천에게 꽤 진지한 매체 아닌가요? 왜 이제서야 전시장에서 보여줄 생각을 한 건가요?

저는 사진에 대한 아주 큰 사랑이 있지만, 지금 100장 넘는 사진을 전시장에 걸어 놓고서도 이걸 작업이라고 해도 되나, 잘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이런 구성을 취한 건 답답해서였어요. 결국 생성된 이미지들이잖아요. 내가 내 눈으로 본 건 하나도 없는 거죠. 평소 사진을 자주 찍어요. 여느 날처럼 별 생각 없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데 순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눈으로 뭘 보고 찍는다는 것이요. 사진을 고른 특별한 기준은 없었고 뭔가를 추억하기 위해 찍은 사진들만 뺐어요. 전시장에 있는 건 예쁘고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 아니라 그냥 눈에 띄어서 찍은 것들이에요.


김희천, <.dng>, 2026, C-프린트, 가변설치,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김희천, <.dng>, 2026, C-프린트, 가변설치,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2015년 작 <바벨>에서 “세계는 스크린이 되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요. 이제 우리는 스크린을 딱히 감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스크린은 이 세계에 없는 것을 실존하는 것인 양 뻔뻔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 동안 세상을 비추는 작업을 해온 당신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사실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내가 하는 얘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 그렇진 않거든요. 많은 작가들이 앞서 던져온 질문들을 똑같이 하고 있어요. 다만 저는 그에 앞서 기술 환경을 기반으로 한 세계관을 집중해서 설명한 축에 속하죠. 하나하나 설득해야 그다음 작업도 이해될 수 있는데, 시간을 들여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상과 현실’ 같은 프레임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2023년도 즈음부터 조금 달라졌어요. 나도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임을 강조하기 시작했죠. ‘나는 나를 어떻게 경험하는가?’ ‘나와 세계는 어떤 관계에 있나?’ 질문과 함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술 이야기를 파고들게 되는 것 같고요.

올해로 작업을 한 지 11년 차가 됐죠. 회사원으로 따지면 차장급, 더 이상 크게 새로울 것이 없어 일에서 지루함을 느끼기 충분한 때고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예술가도 비슷한 것을 느끼나요?

어디서 우연히 들은 말인데, 영화 감독도 예술가도, 어차피 했던 말을 계속하는 거래요. 대체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끝없이 탐구해도 결론 지을 수 없는 얘기인 경우가 많아서, 매 작업마다 조금씩 다르게 얘기해보는 것일 뿐이라는 거죠. 정말 그래요. 이번에는 좀 다르게 접근해보려고 하지만, 기존에 해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봐요. 실망도 하고, 때로는 실패했다는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연스러운 거라고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정에서의 변화는 분명히 있거든요. 조금씩이라도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니까요. 그거면 된 거죠.


<커터 3>와 <더블 포저>, 신작 <레몬>, 몇 장의 사진 작업이 함께인 제2전시실. 김희천 뒤로는 신작 <레몬>이 재생되고 있다.

<커터 3>와 <더블 포저>, 신작 <레몬>, 몇 장의 사진 작업이 함께인 제2전시실. 김희천 뒤로는 신작 <레몬>이 재생되고 있다.

금천구에 위치한 서서울미술관에는 동네 어르신이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습니다. 모든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해 2시간 반을 꽉 채우는 사람, 그중에서도 작가의 진짜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소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작가로서 완벽히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두렵지는 않나요?

작업을 세상에 내놓은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이해를 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됐어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 모든 것이 이해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의 일은 책임감을 갖고 작업을 하는 것이지,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김희천: 두더지들»은 서서울미술관에서 11월 8일까지 열린다.


고영진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언젠가 김희천이 만들게 될 영화를 보고 싶다. 시댄스 12.0이 나올 때쯤이라면 생성형 AI로 만든 것이어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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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사진/ 박상준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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