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패션쇼의 성공을 판가름하는 건 바로 이것!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기발함과 실험정신이 빛난 7개의 공간들.

프로필 by 이진선 2026.01.07

LET’S START THE SHOW!


약간의 비약을 더해 최근 패션쇼의 성공 여부는 쇼장에 막 들어섰을 때 마주하는 풍경과 그 분위기에서 판가름이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트 디자인이 스토리텔링의 궁극적인 형태가 된 2026 S/S 시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기발함과 실험정신, 탄성을 자아내는 압도적인 규모로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은 7개의 공간을 만나보라.


에펠탑 아래 피어난 수국_ SAINT LAURENT

매해 파리 패션위크의 포문을 여는 쇼. 에펠탑이라는 상징적인 건축물을 배경으로 해서일까? 생 로랑의 런웨이 쇼에는 늘 드라마가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수천 그루의 흰색 수국이 게스트들을 맞이했다. 조명이 켜진 에펠탑 아래 수국 정원, 이토록 로맨틱한 조합이라니! 쇼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솟구쳤음은 물론이다. 이번 런웨이는 안토니오 바카렐로가 생 로랑에서 선보이는 30번째 쇼. 이를 기념하듯 수국이 자리한 모양새 역시 하우스의 로고인 ‘YSL’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창립자인 이브 생 로랑의 이니셜이 얽힌 YSL 로고는 패션사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로고 중 하나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화가 카산드레(Cassandre)가 1961년에 디자인했고, 에디 슬리먼 시절 잠시 뒤편에 물러나 있다 바카렐로 시대에 이르러 다시 주목하기 시작한 것. 쇼가 시작될 무렵, 록 밴드 택시 걸(Taxi Girl)의 대표 곡인 ‘Paris’가 흘러나오고, 파리의 밤은 한층 더 드라마틱해졌다.


마티유의 우주_CHANEL

이번 시즌을 통틀어 가장 주목받은 쇼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 데뷔 쇼가 아니었을까. 기대감을 안고 그랑 팔레에 들어선 사람들은 그곳에 펼쳐진 마티유의 우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라거펠트 시절의 세트 규모를 떠올리게 하는,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유색 안료로 마블링된 광택 있는 검은색 바닥에 형형색색의 구체들이 반사되었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태양계의 행성들이 초현실적인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쇼 세트를 통해 자유와 국경 없는 옷차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그.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을 봅니다. 또 우리 모두는 같은 별을 보죠. 무엇이든 보편적인 것이 있어요. 또한 아름답고 즐거워야 해요. 이것이 바로 패션에 있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겁니다.” 샤넬을 새로운 궤도에 올려놓은 마티유 블라지의 말이다.


마크 뉴슨의 픽셀 박스_FENDI

현재 애플 소속인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마크 뉴슨(Marc Newson)과의 협업으로 주목을 받은 펜디의 쇼장 인테리어. 팔라초 펜디 내부에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감싼 다채로운 컬러 블록 구조물이 다양한 크기와 높이로 쌓여 있었다. 마크 뉴슨은 펜디의 새로운 컬렉션에서 발견한 우아한 꽃무늬와 펜디 고유의 퀼트 구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했다. 세트를 위에서 보면 마치 이미지 픽셀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컬러에 중점을 둔 이번 시즌의 룩, 더 나아가 쇼 전체의 구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시가 살롱으로 변신한 콜레주 데 베르나르댕_ACNE STUDIOS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양식 건축물 중 하나인 콜레주 데 베르나르댕(Collège des Bernardins)에서 런웨이 쇼를 선보인 아크네 스튜디오. 그 공간을 그 모습 그대로 선보인다면 요니 요한슨이 아닐 것. 망가진 것과 세련미 사이의 양가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 그는 건물 본당을 아늑한 시가 바 느낌의 라운지로 탈바꿈했고, 콜라주 예술가인 파시피코 실라노의 작업물로 벽면을 꾸몄다. 스톤월 폭동과 에이즈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아카이브 인쇄물로 동성애적인 작품을 만드는 실라노의 신선한 작업물이 13세기에 지어진 교회 건물과 오묘한 조화를 이뤘다.


한국과 이탈리아 장인의 만남_BOTTEGA VENETA

보테가 베네타의 상징적인 직조 기법인 ‘인트레치아토(Intrecciato)’가 탄생 50주년을 맞은 해에 데뷔 쇼를 선보이게 된 루이스 트로터. 쇼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오색 빛깔의 유리 스툴과 천장에 매달린 꼬임 장식의 거대 설치물이었다. 직육면체 구조의 유리 스툴은 무라노의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것으로 밀라노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인 6:AM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린, 블루, 레드, 앰버 컬러를 비롯한 10가지의 매력적인 색조가 쇼장에 생기를 더했다. 천장의 설치물은 이광호 작가의 작품으로 인트레치아토를 입체적으로 확장한 풍경을 구현한 것이 돋보인다. 얇은 가죽 끈인 ‘페투체(Fettucce)’를 교차해 완성하는 인트레치아토와 달리 전선을 엮어 완성했다. 한국과 이탈리아 장인의 결과물이 한데 어우러져 더욱 뜻깊었던 공간 예술의 장.


뒤집힌 피라미드_DIOR

조너선 앤더슨의 첫 디올 여성복 런웨이 쇼는 하우스의 상징적인 장소인 튀일리 정원에서 열렸다. 내부로 들어서자 회색빛 대리석 세트의 중심에 거대한, 게다가 뒤집혀 있는 피라미드가 자리해 있었다. 쇼 공간을 디렉팅한 인물은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와 프로덕션 디자이너 스테파노 바이시(Stefano Baisi). 두 사람은 조너선 앤더슨이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한 2024년 영화 <퀴어(Queer)>를 통해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모두의 기대 속에 시작된 쇼. 뒤집힌 피라미드는 거대한 LED 스크린이었고 이를 통해 다큐멘터리 감독 아담 커티스가 제작한 기념비적인 영상이 상영되었다. 필름이 끝날 때쯤 피라미드 아래 내내 놓여 있던 슈즈 박스의 존재 이유도 알게 되었고.(마지막에 모든 것들이 슈즈 박스로 빨려 들어가며 영상은 끝이 난다.)


아디오스, 아르마니!_GIORGIO ARMANI

지난 9월 4일 타계한 이탈리아 패션계의 거장, 조르지오 아르마니. 2025년은 하우스의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해로 이를 기념해 9월 11일부터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에서 그의 여정을 조명하는 전시를 개최하려던 참이었다. 아르마니 그룹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엠포리오 아르마니(25일)와 조르지오 아르마니(28일) 런웨이 쇼, 그리고 전시(24일) 모두 계획대로 진행할 것임을 발표했다. 특히 조르지오 아르마니 쇼는 그를 추모하며 밀라노 패션위크의 폐막 쇼로 경건하게 치러졌다. 저녁 7시, 브레라 미술관의 유서 깊은 안뜰로 블랙 타이 룩 차람의 게스트들이 입장했다. 곳곳에 자리한 등불이 공간을 은은하게 밝혔고 캣워크는 대리석 바닥, 그 옆에는 하우스의 시그너처인 크림 컬러의 안락의자가 회랑의 아치 둘레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이윽고 시작된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의 공연. 그 선율에 맞춰 우아하게 워킹하는 모델 군단을 보며 이브 생 로랑의 명언이 떠올랐다.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영원하다”고.

Credit

  • 사진/ Launchmetrics.com(샤넬, 디올, 아르마니), Saint Laurent, Bottega Veneta, Fendi, Acne Studios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