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샤넬 X 예올이 주목한 올해의 작가, 박갑순과 이윤정

양태오 감독이 기획한 전시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에서 박갑순과 이윤정이 주목한 것.

프로필 by 고영진 2025.09.29

여지의 공예


재단법인 예올과 샤넬은 매년 서로 다른 세대의 공예가와 공명한다.올해의 주인공 지호장 박갑순과 금속공예가 이윤정의 작업에서 발견한 전통과 동시대의 묘합.


이윤정

금속을 소재로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재료를 탐구한다. 대표적으로는 ‘못’ 작업이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녹은 금속’을 활용한 주조 신작을 선보인다. 처음으로 주조의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해 의자와 테이블 같은 큰 가구를 만들었다.


박갑순

지호공예는 거푸집에 한지로 만든 종이죽을 덧붙여 생활용품을 만드는 전통공예 기법이다. 전주에서 활동하는 지호장 박갑순은 1999년부터 지호공예에 발을 들였고 지난해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신규 보유자로 선정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전통 민화에서 영감을 받아 빚어낸 동식물 형태의 기물을 선보인다.


박갑순, 이윤정 작가의 합작품 괴목 화병. 썩은 나무에 생긴 구멍을 그대로 살려 종이죽을 입히고, 꽃을 형상화한 금속 장식을 더했다.


이윤정 작가가 주조의 전 과정을 직접 수행해 만든 금속 의자.


박갑순 작가의 지호 작품. 장수를 상징하는 길상의 동물인 삼족 두꺼비에서 영감받았다.


박갑순, 이윤정 작가의 또 다른 합작품인 지호 합. 박갑순 작가가 서예를 연습한 종이로 만든 지호 위에 이윤정 작가의 주석 덮개를 올렸다.


하퍼스 바자 예올과 샤넬이 함께 선보이는 ‘올해의 장인, 올해의 젊은 공예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시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을 개최한다. 핵심 키워드인 ‘자연’에는 어떻게 접근했나?

이윤정 모든 것이 각자의 모양 그대로 있는 상태. 그래서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는, 모두가 돌연변이인 상태. 내가 내린 ‘자연’의 정의다. 덜고 더하는 가공의 과정 없이 녹인 금속 본연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다룬다는 점에서 내 작업은 철저히 자연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 작품 중 미처 틀 안으로 금속 물이 다 들어가지 않아 구멍이 생긴 주석 화병도 그렇다. 이렇게 의도치 않은 결과물에 더 만족할 때도 있다. 선생님과 내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같은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작업을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고 시작한 프로젝트라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박갑순 자연은 지호공예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다. 닥나무 섬유인 한지를 쓰고, 가장 떫은 맛이 나는 7~8월의 땡감을 찧어 얻은 감물로 옻칠을 대신하기도 하듯, 자연에서 얻은 소재를 사용한다. 소재에 어떤 인위적인 손길도 더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썩고 상하는 것까지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우리의 합작품 중 하나인 화병은 괴목을 가지고 작업했다. 썩은 나무의 구멍을 메우지 않고 살렸다. 나무의 질감을 유지하기 위해 색 한지를 쓸 때 닥나무 섬유질을 겹겹이 살려가며 형태를 잡았다. 기획자 양태오 감독도 내 작업의 이러한 부분에 주목한 것으로 안다.

하퍼스 바자 종이와 금속에는 각각 유약하고 단단하다는 성질이 있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소재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했나?

이윤정 우리가 전혀 다른 소재를 쓰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구현할 때 쓰는 방식은 동일하다. 나는 녹인 금속을 사용하기 때문에 반드시 금속이 흘러 들어갈 몰드가 필요하다. 선생님의 작업 언어로 말하자면 거푸집인 것이다. 우리 모두 형상의 기준이 되는 틀에다 재료를 입히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이 지점 때문인지 각자의 작업을 봤을 때도 미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낀다.

하퍼스 바자 박갑순 작가는 낡은 고서, 자투리 한지처럼 쓸모를 다한 종이를 여러 겹 쌓는 과정을 거쳐 물건을 만든다. 이윤정 작가는 못처럼 일상 가까이에 스며들어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사용하거나 과정 자체를 돋보이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결과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재료를 작업의 중심으로 끌고 온다는 점도 닮아 있는 것 아닐까.

이윤정 한마디로 우리는 ‘여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내 작업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작품을 볼 때도 항상 변화될 여지를 두고 상상하는 편이다. 그것까지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박갑순 선생님의 작업에서도 비슷한 지점을 봤다. 형태적으로는 완결의 성격이 보이더라도, 계절이나 사용한 재료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계시다 느꼈다.

박갑순 정확히 봤다. 지호는 결코 서두를 수 없는 작업이다. 종이죽을 한 겹 올리고 건조되기까지 지긋하게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림은 곧 여지의 시간이다. 수만 가지 변수가 끼어들 수 있는 시간. 이윤정 작가의 말마따나 실제 작업을 할 때 계절이나 재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이 변화하는 것을 수시로 목도한다. 감물을 칠한 종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검게 변하고, 닥나무의 섬유질은 제 스스로 움직여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변화된 상태를 실패가 아닌, 작품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하퍼스 바자 하지만 전시장에 들어섰을 땐 전혀 다른 지점부터 눈에 띈다. 박갑순 장인의 작품은 주로 한 손에 담기는 작은 크기의 오브제 위주라면, 이윤정 공예가의 작품은 의자나 테이블처럼 볼륨이 큰 가구가 주를 이룬다. 한쪽은 정겹고 따뜻한 인상을 주는 반면, 한쪽은 절제되어 있고 차갑다. 극적인 대비는 의도한 것인가?

박갑순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질문을 듣고 처음으로 우리 작업이 정반대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으니.(웃음) 내가 이렇게 작은 생활용품 위주로 작업한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반대로 윤정 작가는 못처럼 크기가 작은 작업을 많이 해오지 않았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윤정 선생님과 종종 뵙긴 했지만 사실 지난 1년간 각자 치열한 전투를 하느라 과정의 소통을 할 수 없는 상태에 가까웠다. 서로의 몫을 해낸 뒤, 오늘 모처럼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전시를 시작하는 타이밍에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웃음)

하퍼스 바자 서로 다른 작업자와 1년간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협업해온 과정이 각자의 작업 세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

박갑순 지금껏 대체로 크기가 큰 작품을 만들어오다, 이번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민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은 생활 도구를 만들어봤다. 불로장생의 상징으로 통하는 복숭아, 민화 속 단골 등장인물 호랑이 같은 요소를 가져다 인센스 홀더로 만들어보는 식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나에겐 발상의 전환이 되어준 작품이다. 나에게 공예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적재적소에 쓰일 수 있는 물건이다. 지호가 현대에서 더 확실한 쓰임을 갖기 위해 늘 고민해왔는데, 이 고민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물꼬를 튼 것 같아 뜻깊다.

이윤정 나에게 이번 전시 작품은 녹인 금속을 틀에 부어 굳혀 무언가를 만드는 방식인 ‘주조’의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해 만들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는 외부 공장에 이 과정을 맡겼기 때문에, 공장 사장님을 설득하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결코 구현해낼 수 없었다. 샤넬×예올 작업은 긴 시간을 갖고 준비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는 건 착각이었지만.(웃음) 도전하는 사람은 성공해내기 직전까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 시간 속에 산다. 지난 수개월이 그랬다. 나는 얼마나 미약한 작가인가. 어쩌면 그동안 너무 쉽게 작업을 해온 것은 아닐까.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불량품만 양산하고 있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작업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자 극심한 압박감과 쫓기는 듯한 공포도 느꼈다. 주조는 단언컨대 과정의 미학이다. 결과까지 가는 길은 지난했으나 어려운 길을 지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것이 많았다. 아직 더 연구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는 상태이고, 또 한 번 도전을 택할 것이다.

하퍼스 바자 작업이 고된 수련처럼 느껴질지라도 결코 손 놓지 않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박갑순 지호장으로서 무형문화유산인 지호공예를 전승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겹겹이 한지를 쌓아올리는 과정이 여전히 즐겁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해봤던 무언가가 있었듯, 앞으로도 크고 작은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윤정 이왕이면 오래, 아니 평생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아직도 만들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영감이 샘솟는 쪽은 아니다. 마치 주머니에 소중한 것들을 잔뜩 넣어 두고 있는데, 물리적 한계 때문에 다 꺼내 보일 수 없어 간직하고만 있는 상태 같달까. 이번 전시는 내 주머니 안에서 가장 꿈틀대는 주조 작업을 꺼내 보인 것이다. 오랜 시간 마음에 품어왔던 것을 꺼내는 순간은 작업을 하며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다. 이 순간이 모여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하퍼스 바자 샤넬×예올 프로젝트는 전통공예가 현대에 어우러질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한 결과다. 프로젝트에 함께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떤 답을 찾았나?

이윤정 우선 분명히 할 것은 ‘전통공예’와 ‘현대공예’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전통을 고루하다고 보거나 진취적인 것만을 현대공예로 취급하려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또한 많은 아트 피스가 그렇듯, 공예품 역시 소장과 실용성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의 소유가 되기 전, 공예품은 공공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점만으로도 공예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내가 서 있기로 한 공예의 자리에서 묵묵히 작업을 이어갈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이따금 가치를 알아봐주는 관람객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갑순 전통공예와 현대공예가 명확히 나뉘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지호는 한옥 생활을 하던 과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업이다. 창문에 바르는 창호지, 서예의 바탕이 되는 한지, 고서들. 1차적 쓰임을 다한 종이를 잿물에 삶아 풀로 반죽해 다시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시절의 지혜를 들여다볼 수 있다. 공예는 다음 세대에 남길 기록물로서의 역할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 박갑순과 이윤정의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은 예올에서 10월 11일까지 이어진다.


Credit

  • 사진/ 전의철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